법정은커녕 경찰서 문턱도 넘어본 적 없는 나이지만, 지하철 공사현장 대관업무를 하며 로펌을 통해 소송을 준비한 적은 있었다. 당시 본사 법무팀 대리님과 같이 해당 업무를 준비했는데,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답답한 점이 꽤나 많더라. 혼자 자료를 준비할 땐 정말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이라고 ㅂㄷㅂㄷ 이를 갈며 준비했는데, 막상 로펌에 가서 변호사님과 미팅을 해본 결과는 참담했다. 변호사님과 법무팀 대리님은 당시 내 나름대로는 상당히 억울하기도 하고 편파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과연 판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하면서 하나하나 지적을 해주시는데, 솔직히 억울하다는 심정이 먼저 앞서게 되더라. ‘아니 당최 당신들 누구 편이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해당 업무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나는 앞서 언급한 대리님과 우연히도 같이 중동 현장에 발령 나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 해외현장은 법무 쪽 대처를 처음부터 미리미리 하는 편인데,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발주자-원도급사-하도급사 간의 원만히(?) 이어가는 관계에 비해, 해외 쪽은 하루에도 수백 통의 이메일 및 레터가 오고 가며 서로의 업무 업역을 구분하고 귀책을 가리곤 한다. 공대를 나온 나는 시공을 하며 외국 하도급 업체를 상대했고, 법대를 나온 대리님은 공무를 하며 발주자를 상대했다. 하도급 업체든 발주자든 어찌 되었든 프로젝트의 큰 틀 안에서는 유기적으로 이어져야 하므로, 나는 법무에 관련된 사항을 그 대리님께 자주 물어봤고, 대리님도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 나에게 자주 물어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서 클레임 레터를 쓰며 발송 전에 그 대리님에게 물어보면, 대리님은 대부분 까칠하게 제삼자의 시선에서 내 레터를 평가해 주었다.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의 기운이 올라오며, 내가 혼자 쓰고 보내고 말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내가 분에 못 이겨 쓴 클레임 레터는 바로바로 반격의 회신이 날아오는 반면, 누구 편인지 모를 대리님이 검토해 준 클레임 레터는 하루 이틀 후에 회신이 오곤 했다. 그리고 그 하루 이틀 후에 온 회신은 반격이 아니라 수긍의 레터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논리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로구나. 편협한 시각으로 점철된 생각은 논리적이지 않게 되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쉽게 그 논리를 허물 수 있는 또 다른 논리를 만들게 해 주는구나. 아울러 같은 계약조항이라 할 지라도, 내 시각에서 읽는 해석과, 발주자의 시각에서 읽는 해석, 그리고 하도급자의 시각에서 읽는 해석은 각기 다 다를 수 있다고. 결론적으로 Each Party는 각자의 환경과 입장에 따라 같은 사안도 바라보는 시각이 상당히 상이하다는 말이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법과 관련된 교양서적을 읽는 것은 재미있어한다. 생각을 더듬어 보면 가장 기억나는 책이 금태섭 의원께서 십 년 전쯤, 아마 십 킬로 정도 더 날씬하셨을 때 내셨던 ‘디케의 눈’이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이 디케라는 법의 여신은 눈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다.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는 법을 통해 진실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책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후작인 확신의 함정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흉악범에 대한 사형은 정당한가, 자백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음란함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음모론 대 국론통일 등 어느 한쪽 시각으로만 판단하기엔 어려운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스 함무라비도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한 책이다. 어느 정의로운 판사가 있다. 신규 임용되었고, 제목에서 보인 바와 같이 여성인 판사이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법원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톡톡 튀는 행동으로 언론 및 SNS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 분, 소설 속이긴 하지만, 좌충우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여러 재판을 통해 조금씩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나간다.
책은 소설이지만, 중간중간 판사가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설명을 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저자이신 문 판사님의 고뇌와 깊은 생각이 군데군데 묻어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몇몇 에피소드들은 그래도 신전에서 광장의 평민들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지우긴 조금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저자도 물론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에피소드 중 등장한 목사나 교수, 그리고 판사같이 어느 커뮤니티 안에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분들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점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평소 툴툴거리며 그 제왕적 권력을 탓하는 목사나 교수, 그리고 판사나 고위 공무원이나 경영자. 나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는 언제까지 일개 소시민으로 그러한 분들의 권력에 피해만 받고 있다고 느낄 것인가. 나도 나의 아이에겐 제왕적 아빠일 수 있고, 하도급사에겐 제왕적 클라이언트일 수 있고, 어느 식당에선 제왕적 손님이, 어느 공무원에겐 제왕적 민원인이, 글을 쓰며 누군가에겐 제왕적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금씩 더 주목하고 있다. 업무를 하다 상사나 동료, 혹은 발주자나 하도급자가 예상과 다른 돌발행동을 하면, 그러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어떤 이유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일단 화를 낼 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아울러 추리소설과 같이 과거와 앞으로의 일을 조금씩 추론해보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며 시야가 좁아서 주관적이지만, 그렇게 조금씩 어떠한 일에 있어서 객관적 시각과 논리를 키워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렇게 객관적 시각을 키워나갈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높아지고, 사회적 갈등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사족일 수 있는 마무리인데, 마지막으로 나에게 그나마 이렇게 어떠한 사안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법무팀 대리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친절하고 똑똑하고 건강하던 그 대리님은, 5년 전 불의의 사고로 나와 같이 중동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이 있지만, 그때만큼 회의감이 컸던 기억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부디 천국에서도 행복한 미소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고, 언젠가 만나게 되면 꼭 전해주고 싶다. 아직도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는 나이지만, 대리님의 도움 덕분에 세상을 달리 볼 수 있었다고. 너무너무 고맙다고. 많은 빚을 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