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이라 하는 동네는, 분명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하는 동네이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낯선 동네의 이름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도 1975년에 생겨났다 하니, 내가 이 근처 학교를 다닐 때에도 분명 있었을 동네였다. 그러나 학교 근처의 그 유명한 동교동과 서교동, 상수동과 망원동은 다 알아도, 제5공화국 시절부터 계속해서 들어온 연희동과 달리 이 연남동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동네였다.
어제저녁, 이 연남동 골목골목을 다니며, 이국적이라고 하기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연립주택+단독주택+모던한 디자인의 건물들이 어우러진 사람 냄새 가득한 풍경을 보며, 그리고 중심가의 아름다운 경의선 숲길을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드디어 우리도 파리의 그 고즈넉한 골목, 코펜하겐 스트뢰게 뒷골목 같은 운치 있는 분위기를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서울 나름의 느낌과 특징이 있는 마을이 생겨난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군대를 포함하여 학교를 7년가량 다니며 이 동네를 여러 번 오긴 왔을 텐데, 왜 나는 이러한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간간히 이 연남동 인근 경의선 길가에 있는 껍데기 집에서 동아리 회식을 했던 기억이 더듬어지더라. 그래, 여긴 원래 철길이었지. 소주를 한잔 머금으면 딸랑딸랑하며 전차가 유유히 지나가던. 그때 그 경의선 철로는 어디로 갔지? 여전히 경의선은 그 수많은 서울 북부 주민들의 소중한 발이 되어 주는데. 그 경의선은 어디로 갔을까.
찾아보니 요것은 개착식;Cut&Cover 터널로 10-20m 밑으로 내려갔고, 그 아래 30-40m에는 공항철도가 마제형 NATM 터널로 생겨났다. 그러니까 지하에는 지하 나름대로 일산으로, 인천공항으로 갈 사람들은 빠르게 이동하고, 지상은 숲길로 조성되었다는 말이다. 예전 철길이 남북을 갈라버렸을 땐, 별개의 동네로 인식되었던 연남동은, 그 철길의 지하화를 통해 넓은 공원을 낀 아름다운 마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 훌륭한 토목기술에 감사의 인사 한 번은 날려줘야지 않나 싶다.
골목골목에는 운치 있고 특색 있는 카페나 음식점들이 매우 많았다. 각국의 음식들도 있었고, 이건 정말 서울에서 밖에 없겠단 곳도 있었다. 오랜 해외출장 끝에 방문한 곳이기에, 나는 유럽 음식이나 소아시아 음식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런 나의 이목을 끈 가게가 있었으니, 그곳은 달빛부엌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남자 두 분께서 요리를 하시는 작은 가게였는데, 그 특색 있는 메뉴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다음과 같았다.
타이식 돼지고기볶음 및 알 배추쌈
돼지고기 항정살 탕수육
블랙빈 소스의 우삼겹 숙주볶음
그리고 순두부 똠양꿍
타이식이긴 하지만 한국과 중국음식의 맛이 가미된 약간의 퓨전음식들이었다. 거기에 미세 거품이 살짝 얹어져 있는 맥스도 음식의 맛을 더욱 돋구었다. 조금 맛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이젠 그 맛을 완전히 구분할만한 미각은 아니라도, 요리사분께서 얼마나 열심히 만든 음식인지 아닌지는 조금씩 구분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냥 음식이 다 똑같겠거니 야채 넣고 고기 넣고 향신료 넣고 한 기계식 레시피 조합의 음식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레시피 이상의 무엇을 느끼게 해줄까 하는 고집과 고민 속에 탄생한 음식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어제의 음식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웠다. 그렇게 정성과 참신함을 담은 음식과 맥주, 오고 가는 이십오 년 우정의 입담 속에 지나가는 하루의 저녁시간은 무던히도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일련의 간접적인 사건으로 인해 요즘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때가 많이 있다. 세상은 아름다워지다가도 다시 슬퍼지기도 하는 그런 롤러코스터와 같은 곳인가 보다. 그렇게 슬프고도 즐거운 인생 속에서, 이렇듯 오랜 친구들과의 진솔하면서도 쓸데없는 대화는,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