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프리카 친구들과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호주 어학연수 시절인 십일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야흐로 대학 4학년 1학기 과정을 마치고 취업을 앞둔 그해 여름에, 나는 이대로 졸업할 수는 없다 생각하고 어학연수 갈 것을 결심하여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넉넉한 자금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겨우 3개월치 어학원 비에 생활비로 자리 잡은 까닭에 나는 삼시세끼 모든 음식을 내 손으로 해 먹기로 결심했다. 과연 집 근처에는 대형마트가 있었고, 걸어서 대략 20분가량 걸렸으니 1.5km 정도 떨어진 곳이렸다. 자동차는 없어 가방을 메고 처음 장을 보러 갔는데, 감자든 양파든 소고기든 식료품들이 무지하게 싸더라. 게다가 이걸 대량으로 사게 되면 훨씬 훨씬 더 쌌다. 어떻게든 돈을 아껴보고자 이들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마트를 나오는데, 이미 백팩엔 소고기와 양파 가득, 양 손에는 감자 50여 개와 우유, 주스 등 비중이 1 tf/m3을 넘는 육중한 제품들이 가득했다. 대충 생각해 봐도 등에 20kg, 양 손에 각각 10kg가량 들었던 것 같다. 뭐 내가 저울이 아니라 정확하진 않지만 말이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하고, 선천적으로 근력이 부족한 나는 이 무거운 것들을 들고 10m가량 낑낑 가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10m가량 낑낑 가고 다시 하늘 한번 쳐다보고를 이어갔다. 그렇게 대략 1km를 꾸역꾸역 간 시점엔 하늘도 노랗고 나도 노랗게 변해가고 있더라.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팔이 내 것이 아닌 느낌. 이쯤 되면 택시를 불러 탈만도 한데, 돈도 없는 고학생이 그런 생각을 할리 만무했다. 감자를 몇 개 버리고 갈까, 양파를 몇 개 버리고 갈까.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 먹을 거 버리면 지옥 가서 다 먹는다 하던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집을 보니 계단에 흑인 남자들 한 세명이 나를 보고 실실 웃고 있더라. 인종차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생 한반도에서 산 한남으로서 흑인에 대한 어느 정도 선입관이 있었기에 나는 그들을 보지 않고 앞으로 10m를 내딛었다. 다시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는 순간. 그들이 나에게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뜨거운 호주 햇살 아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이 감자와 양파 더미들이 탐이 난 걸까. 이들을 버리고 당장이라도 달려 도망가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 흑인 장정 세명은 나를 둘러싸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얘 너 집이 어디니?”
아니 내 집을 왜 물어보지? 영어도 더듬더듬하던 그 시절, 나는 토익 공부하며 외웠던 표현이 생각나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None that I know of”
집을 물어보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니, 이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2-3초간 나를 쳐다보더니 사태를 파악했는지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아니, 야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야. 우린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들인데, 아까부터 보니까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우리가 차로 널 집에까지 태워주려고 한 거야.”
어익후. 이제 나를 차에 태워서 납치를 하시겠다? 나는 점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두 걸음 뒷걸음을 치니 이들은 다시 다가왔고, 다른 친구 한 명이 차를 가져와 내 앞에 세우더라. 이젠 사실 더 이상 거절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탔다. 아, 이대로 이역만리 땅에 와서 영어 한마디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인도양 원양어선에 팔려가는구나. 그나마 그 정도면 다행이지, 혹여나 장기매매 이런 건 하지 않겠지. 그래도 선진국인데, 그런 정도의 치안과 인권은 존중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들의 차를 탔다.
차는 엘란트라였다. 그러니까 현대의 아반떼.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갑자기 이들은 LG 휴대폰을 보여주며,
“야, 우리는 LG 휴대폰도 쓰고 현대차도 타고 다니는 Korea-friendly 한 사람들이야.”라고 말을 하더라. 너네 한국 제품 좋다고.
계속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고, 정말 착한 사람들 같더라. 자세히 보니 다들 얼굴 면면에 ‘나 착함’이라 써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더라. 당시만 해도 신실한 신앙심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그 목걸이에 대해 물어보았고, 이들은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온 친구들이며, 다 같이 아프리카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우리 교회 올래?”
이거였구나. 그래. 전도지. 전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리 만무하지. 순간 인류 이단의 역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기독교라고 다 같은 기독교인가.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그리고 가톨릭 기타 등등 겁나게 많지.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몰몬교, 콥트교, 제7일 안식일교 등등 각도가 살짝 다른 기독교도 상당히 많지 않은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시험하시나이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집에도 가지 못하고 사막의 비어디드 드래건 도마뱀과 같이 말라죽을뻔한 나를 이렇게 차로 편히 데려다줬으니 한 번은 가봐야지 않겠나 하고 간다고 이야길 했다.
두둥. 일요일은 도래하고, 나는 그들이 전해준 주소를 따라 인근 캠퍼스 안에 있는 강당에 들어갔다. 순간 가스펠 소리가 들려오며, 무언가 휘트니 휴스턴과 우피 골드버그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소울이 느껴지더라.
“I will follow him~ follow him wherever he may go~ There isn't an ocean too deep~ A mountain so high it can keep me away~”
흑인 소울. 아 이런 거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그 예배의 현장으로 빨려 들게 되더라. 아프리카 친구들은 평소 댄스를 많이 추는지, 가스펠을 부르면서도 들썩들썩 어깨를 움직이며, 스텝을 밟아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둥글게 대형을 갖추고 아프리카 부족 의식과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한 명씩 돌아가며 개인 댄스 시간도 갖으며. 초등학교 때 비록 제주도 심신으로 이름을 날려 소풍 때마다 선글라스를 챙겼던 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가 나온 이후로 댄스로의 발걸음을 끊었던 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러던 중 나의 개인 댄스타임이 찾아왔고, 나는 당시 유행하던 ‘강호동의 천생연분’의 연예인들을 생각하며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뭐 틴틴파이브의 로보트춤,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까지 고냥 생각나는 대로 정말 막춤이란 막춤은 다 추었는데 별안간 아프리카 친구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언가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어학원에 다녀온 후에 이 친구들 집에서 저녁식사도 같이 하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같이 보고, 파티도 하면서 반년 정도를 거의 가족과 같이 지냈다. 사실 알고 보니 이들은 짐바브웨에서 사립학교를 상류층 아이들이었고, 가족들도 영국 등 유럽에서 거주하며 의사, 변호사를 하는 부자들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만 왔지 빈털터리인 나와는 다른 환경이었던 것이다. 상류층이라 할지라도 이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그 특유의 끈끈함이 있었다. 무언가 더 챙겨주려고 하고, 같이 웃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공유하려는 특성이 보였다. 물론 이들을 통해 일반화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들과 함께 지낸 호주에서의 6개월이란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덕분에 영어도 많이 늘었고, 세상을 보는 시야도 많이 트였다.
수많은 시간은 흘러 나는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아프리카에 자주 오곤 한다. 아침에 밥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하며 아프리카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항상 소울풀 가득한 인사를 해준다. 한두 달 건너 다시 출장을 와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가벼운 포옹을 해준다. 아프리카 어떻냐고. 파인? 파인? 뭐 불편한 거 없냐고. 한국사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챙겨준다. 심지어 청소부 아주머니도 오래간만이라 반갑다고. 극진한 환대를 해준다. 나는 이러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다. 물론 치안이 좋지 않은 어느 시골이나 다른 나라로 가면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 풍겨 나오는 가스펠과 소울 가득한 애티튜드가 나는 친근하다. 과연 내가 이 땅에서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들과의 관계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점점 개인주의가 만연 해지는 한국에서는 느끼기 조금 힘든 가족 같은 분위기. 나도 본디 딱히 그런 가족 같은 분위길 좋아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함박웃음 지어가며 우정을 과시하는 그들이 있어 일하는 맛이 조금은 더 나는 것 같다. 그들과 조금 더 친해지고자 그들 부족 언어로 인사를 한다. 발음도 상당히 어렵다. 그래도 그들 부족 언어를 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더욱더 즐거워한다. 그만큼 서로 간의 노력이 쌓여 돈독한 관계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업을 하며 돈을 벌고, 인프라를 세우는 것이 물론 우선이지만, 이러한 친밀한 상생을 통해 이 땅의 영아사망률을 낮추고 깨끗한 물과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