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12년을 다니며 매주 듣던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이유는, 그 훈화 말씀이 지나치게 상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마나 한 말들의 연속이었으니. 아. 물론 내가 불성실한 학생이라 그랬을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새로 취임한 김상조 공정거래 위원장의 취임사는 꽤 신선하다. 본인의 경험이 녹아들어 듣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하게 하고,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한번 더 귀를 기울이게 한다. 잠깐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첫째, 공정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정위의 시대적 책무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분이 처음 공정위원장으로 내정되었을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별명인 '삼성 저격수'와 같이 특정 대기업을 중심으로 공정위의 역할을 편중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분은 처음부터 공정위의 존립 목적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이라 천명했다. 당연히 특정 대기업들이 시장경제를 어지럽히고,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공정위의 첫 번째 목적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간다.
"두 번째로, 공정위가 시대적 책무를 수행하는데 많은 제약요인들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신임 위원장은 공정위의 목적과 우리 사회가 공정위에 요구하는 바가 다소 상이한 부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공정위의 궁극적 목적은 "시장의 경쟁구조를 유지, 강화함으로써 소비자 후생을 증진하는 것"이 경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끔 안타까운 하도급 중소기업, 가맹점주, 대리점 사업자, 골목상권 등 '을'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전파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악덕 중소기업 사장, 가맹점주, 자영업자들도 우리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만약 공정위가 무작정 이 분들의 입장만 배려한다는 정책으로 보호하고 나선다면, 오히려 시장의 질서는 어그러지고, 시장은 활력을 잃고, 오히려 더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분들의 부당함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임 위원장은 이러한 법제도적 기반과 사회적 요구 간의 시각차를 인정하고, 유관부처 및 국회와 진정성 있게 논의하며 풀어나가겠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너무 거칠다,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약하다는 비판을 받을 것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위는 최선을 다 해 해결을 해보겠다고 한다. 나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데, 덮어놓고 자기는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디테일하게 따져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을 구별하고, 제한된 시간과 예산, 인력 안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신뢰감이 간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공정위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공’과 ‘늘공’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저처럼 ‘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을 ‘어공’이라고 하고, 여러분처럼 직업공무원으로서 묵묵히 ‘늘’ 한길을 걸어온 분들을 ‘늘공’이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공’으로서 해야 할 일이 뭐겠습니까? ‘늘공’인 여러분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에 근거하여 내린 판단을 일관되게 실행할 수 있도록 외풍을 막아주고, 그럼으로써 조직과 직원을 보호하는 것이 ‘어공’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여러분께서는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일관되게 실행하십시오. 그다음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제 역할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학자 출신으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조직의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신임 위원장은 조직을 잘 이끌어갈 가능성이 있구나를 보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 공정거래 위원장으로 취임하더라도, 평생을 해당 업무를 해 온 담당 공무원보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잘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신임 위원장은 어공과 늘공이란 단어로 그 구분을 확실히 한다. 하지만 리더라면, 외풍을 막아주고 조직과 직원을 보호하는 것이 책무임을 잊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한길을 걸어온 공무원들에게 자괴감이 들지 않고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공무원의 높은 윤리의식과 청렴성을 강조하며, 조금은 단호한 경고의 자세를 취한다. 세상에 좋기만 한 리더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당근과 채찍을 효과적으로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리더가 정말 유능한 리더일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한번쯤 경고의 말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단어는 '자긍심'이다. 조직원들은 때로 정말 수동적으로 일한다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자긍심으로 말미암아 능동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으로 같은 월급을 받고자 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일이 시장경제의 공정함을 확립시켜주고, 내가 하는 일이 한국경제에 활력을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업무에 대한 생산성도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무언가 소명의식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몇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을 훑어봤는데, 이쯤 되면 잘 한 인사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나는 비판적 지지자로 지켜볼 요량이지만, 이러한 호감도가 이 분이 공정위원장에서 내려올 때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화이팅이다!
취임사 전문 참조: http://news.joins.com/article/21664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