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주말을 맞이하여 갠지스강 낙조나 볼까 하고 나룻배를 타러 길을 나섰다. 철수 씨라 하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나룻배를 예약했는데, 그 사장님은 인도 분이시고 전화통화가 가능할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셨다. 나룻배를 타기 위해 강가를 따라 길을 걷는데, 수많은 인도인들이 짧은 영어로 호객행위를 하더라. 나룻배 있다고. 낙조를 볼 수 있다고. 나는 예약을 한 배가 있으니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룻배를 탔다. 철수 씨라 하는 인도 사장님은 노를 저으며 갠지스강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하시기 시작했다. 시바신과 강가신의 만남은 인도인에게 성스러운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인도에는 여러 계급이 있지만, 지금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계급이 낮더라도 총리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넉넉하게 산다고.
낙조 감상이 끝나고 우리는 이 아저씨에게 각자 백 루피 정도를 드렸다. 한 열명 정도 되니 매일 천 루피 정도는 이 나룻배 하나로 버는 것 같더라. 천 루피씩 20일만 번다 쳐도 2만 루피인데, 이쯤 되면 삼십만 원 정도 되며, 인도의 웬만한 근로자의 월급 수준이 된다. 아마도 게스트하우스 수익까지 감안한다면, 철수 씨는 인도에서 꽤나 소득이 높은 편에 속할 것이다.
나는 물어봤다.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냐고. 한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냐고. 철수 씨는 그냥 여기 갠지스 강가에 있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관광을 많이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독학으로 배웠단다. 돈을 좀 벌고 한국에 다녀온 적은 있지만, 그것도 한두 달 정도라고.
다른 나룻배들의 가격을 물어봤다. 대략 철수 씨 나룻배의 절반 가격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대부분 저학력 계층이 그러하듯, 이들은 영어조차 잘 하지 못한다. 결국 인도 역사 및 종교에 대한 설명은커녕, 한두 시간 동안 그냥 노만 젓는다고. 한국인으로서 철수 씨의 나룻배는 효용가치가 일반 인도인이 운영하는 나룻배보다 열 배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화로 예약도 가능하고, 현지에서 길을 잘 몰라도 친절히 가르쳐준다. (갠지스 강가엔 나룻배가 수백 척이어서, 그냥 인도인이 가르쳐주면 해당 배를 찾아가기 무지 어렵다) 아울러 한국어로 인도의 역사 및 종교, 관습 및 정치 경제 이야기까지 들려주니, 그 한두 시간이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솔직히 돈을 더 드리고 싶었다. 우리 기준에 1,600원가량은 너무 저렴하기에.
자, 여기서 만약 그 옆에 있는 인도인이 철수 씨를 보고 폭리를 취하고 있으니 당장 선박 이용금액을 절반 정도로 낮추라고 하면 어떠할까. 나룻배도 똑같은 것이고, 노를 젓는 노동도 같아 투입 리소스는 같은데, 당신은 왜 나의 이익의 수십 배를 가져가냐 이 논리로 말이다.
억지논리일 것이다. 결국 시장에서 가격이라 함은 투입되는 재료나 인건비와 같은 판매자가 투입한 리소스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구매자가 해당 금액을 지불하고도 기꺼이 효용가치를 만족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 특정 브랜드의 치킨 가격이 비싸다 생각하면 그저 안 먹으면 된다는 것이고.
다시 이것을 노동의 관점으로 가져가 본다면, 의사나 변호사가 청소미화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들이 기꺼이 그 높은 금액을 지불할 의사가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명의를 찾아가고 싶은 것이고, 10억 원의 소송에서 이기고 싶으면 기꺼이 1억 원도 지불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아니면 대체할 수 없기에, 특정 의사나 변호사의 몸값은 올라가기 마련인 것이다. 마치 보통의 인도 나룻배 사공보다 철수 씨가 두배 가량의 가격을 받듯이 말이다.
재산세나 상속세, 증여세 쪽에서 세율을 올려야 한다는 말은 심정적으로 이해는 간다. 하지만 스웨덴 및 북유럽 국가의 예를 본다면 그것도 사회정의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다고 고소득자의 소득을 강제적으로 조정하거나, 소득세를 높여 실질소득을 줄인다면, 해당 사회의 구성원은 근로의욕을 잃을 수 있다. 내가 노력해서 그 능력을 통해 높은 소득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능력을 개발할 것이고, 그러한 각자 개인 능력의 신장을 통해 새로운 제품도 나오는 것이고, 시스템의 개선도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빌딩을 가지고 있다는 방송인 서장훈 씨가 짧은 강연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자기가 빌딩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국내 농구리그 득점 기록, 국보급 센터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과 꾸준한 기량이 있었으니 가능한 것이라고. 자기는 이게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고 하더라. 아울러 자신은 징크스를 깨기 위해 수많은 습관을 만들다 보니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관리를 했다고. 매일 경기가 끝나면 리플레이를 돌려보며 자기반성을 하고.
이렇게 훌륭한 농구선수와 평범한 농구선수의 연봉 차이는 대략 수십 배 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연봉 차이에 대해 부당하다 생각하진 않는다. 코트에선 5명밖에 뛸 수 없는데, 서장훈이 보여주는 기량은 다른 평범한 2-3명의 선수보다 훨씬 뛰어나, 현격한 차이의 아웃풋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러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능력, 조금 더 열심히 하는 노력이 모여 그 사람의 아웃풋을 보여주게 된다. 거기서 그러한 장기간의 노력과 능력을 무시하고, 같은 국민이니 비슷한 수준의 소득군으로 가자고 하는 것은 오히려 역차별의 소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갠지스강의 모든 나룻배의 가격을 50루피로 통일시켰다면 철수 씨와 같이 스스로 한국어를 배워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할 사람이 생겼을까? 이리 노를 저으나 저리 노를 저으나 똑같은 임금을 받는다면, 그냥 자기계발은 하지 않고 힘 빼지 않고 천천히 젓는 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동물의 왕이라 할지라도, 사냥을 게을리하는 사자는 굶어 죽듯이, 사람도 조금 더 나은 능력을 계발하여 높은 소득을 추구하고, 그로 인한 자산의 축적을 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 출발선의 공평, 과정의 공정, 등은 국가기관에서 제대로 시스템을 정비해야겠지만, 결과의 평등? 그건 소련의 스탈린도, 중국의 덩샤오핑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중간 기말고사를 보지 않게 한다는 말도 나오던데, 학교라는 단어의 뜻이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란 말인데, 이쯤 되면 그 무얼 가르치고 무얼 배우려 하는지 모호해진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를 돌이켜 보았을 때, 평가가 없는 상황에서 수업내용을 스스로 공부하고 능력을 성장시킨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모두가 원하는 대학이나 직업을 얻을 수 없다면, 언젠가는 경쟁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내 생각에 중간 기말고사를 없앤다는 말은, 그 유예기간을 언제로 두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덮어놓고 당장의 경쟁을 없앤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계속 행복해질 리 만무하다. 언젠가 부딪힐 경쟁이라면, 조금씩의 연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