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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Jul 19. 2017

전문가의 영역과 시민의 영역

나는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교량이나 해저터널과 같은 해외인프라사업 입찰업무를 주로하는 해외건설 전문가다. 학부생 시절, 구조역학을 가르치던 정년퇴직을 앞둔 노교수님은 매번 우리에게 일상의 언어로 구조역학 답안지를 작성하라고 요구했다. 계산문제야 어쩔 수 없다지만, 단면 이차 모멘트와 같이 직관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단어에 대해 가능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답안을 서술하라 말씀하셨다. 십오 년쯤 지나 이제 그 노교수님의 워딩도 가물가물하지만, 기억에 의존한 그 교수님의 말씀은 이러했다.


학생 여러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일하다 보면, 건설업 전문가들과만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때로는 시민에게도 이 구조물의 작동원리를 설명할 일이 많아요. 그때마다 베르누이 방정식이나 단면 이차 모멘트 수식을 펼쳐가며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구조물이란 것은 구조 역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 속의 공공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들께 가능한 한 최대로 자세히 설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제, 그러니까 2017년 7월 17일, 한국일보 오피니언란에 이러한 칼럼이 등재되었다.

[이충재 칼럼] 원전 전문가는 가라, 시민이 옳다 (http://hankookilbo.com/v/c2660d596bbe40778b89b0226997e30c)


전문가는 가라니. 나는 늘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매 사안을 전문가와 같이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력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현업에 따른 시간의 제약, 정보의 제한일 수도 있다. 아울러 언급된 원전 콘크리트 구조물의 장기 내구성능 평가만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적분부터 시작하여 대학 수학, 공업수학은 물론 정역학, 고체역학, 구조역학까지 선행되어야 할 학습이 무지 많다. 여기까지도 그 '이해'의 수준이지, 실제로 해당 구조물을 제대로 설계하고 유지 관리하려면 압축강도, 초음파 속도, 철근 피복두께 및 중성화 깊이, 전염화물이온량, 자연 전위 등 석박사 수준의 공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 안전에 대한 적확한 판단은 가능할 것이고.


책임, 윤리를 망각한 전문가 집단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칼럼에 언급된 일련의 사건들은 정말 그 전문가들의 윤리의식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그 결론이 전문가는 가라, 시민이 옳다.라고 이어지는 것에는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여기서 문제는 그 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이 밀실에 앉아서 자기들끼리의 윤리 수준, 관행을 가지고 어떠한 결정을 하는 것이지, 그 전문가들 역량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련의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공개, 충분한 전문가들 간의 토론을 통한 대중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당장 시민이 어떠한 전문적 사안에 대해 결정해야 되는 일은 아니란 말이다.


당장 여기 두께가 1m가 넘는 매스콘크리트 하나를 시공한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거푸집을 오늘 떼어야 하는지, 내일 떼어야 하는지, 일주일 후에 떼어야 하는지는 전문가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지 시민들이 모여서 투표로 판단해야 할 사안은 아니다. 관통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어떠한 습윤 양생을 할 것이며, 파이프 쿨링 등의 방법을 통해 어떻게 수화열 온도제어를 통해 어떻게 콘크리트 표면 수축을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요구된다. ACI(American Concrete Institute)나 BS(British Standards)등의 국제 시방서와 각국의 유수 연구단체 및 학회의 논문, 수화열해석, 실물대 시험, 그리고 현장 기술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시민과 협의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삼 년 전쯤 독일과 덴마크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프로젝트에 입찰한 바 있다. 처음 그 해저터널의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좀 많이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덴마크 교통부는 대중에게 공개된 홈페이지에 각종 연구논문 및 자료를 엄청나게 많이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사업비는 물론 왜 사장교나 현수교가 아닌 해저터널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전문가 및 시민 공청회는 얼마나 열었으며, 환경영향평가나 지질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결괏값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 오픈되어 있었다. (홈페이지 참조: http://femern.com/en)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해저터널은 독일 측 민원의 영향으로 언제 착공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덴마크와 독일 측 시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수백억 원 수천억 원이 발생할 수도 있다. 당장 해당 해저터널이 계획되고, 현재까지 추진된 것도 십 년이 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 절차와 과정을 통해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설명하고 결정내어가는 과정. 전문가든 시민이든 독단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정에는 누군가의 아쉬움이 묻어 날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사회에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사안이라면 그때는 어느 정도 다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민은 시민 나름의 역할이 있고, 전문가는 전문가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정치는 그 둘의 의견을 잘 조율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부디 그 각자의 역할을 혼돈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배경화면 출처: https://europamedia.blogactiv.eu/2016/04/26/looking-for-a-marketing-specialist-join-europes-leading-provider-of-practical-solutions-on-eu-project-development-and-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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