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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Aug 09. 2017

직업의 선택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90년대에 교대는 그렇게 인기 있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남녀 구분하여 선발했는데, 남자의 커트라인은 여자에 비해 좀 낮은 편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게 IMF 금융위기를 겪으며 안정적 직장을 원하는 사람들이 교대로 쏠리게 되며 입학점수는 해가 다르게 높아졌다. 나와 성적이 비슷하여 인천교대에 진학했던 친구는, 스카이를 가려고 중간에 학교를 관둘까 하다 군대를 다녀왔는데, 갑자기 높아진 커트라인을 보고 감사히 공부를 마치고 교사가 되기도 했다.


나의 부친도 교사셨는데, 내가 수능을 보고 원서를 쓰는데, 나에게 부단히도 교대나 사대를 갈 것을 원하셨다.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당시 나의 선택을 존중해 준 아버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가이드라인은 충분히 제시하는데,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 나도 나의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양육스타일이다.


얼마 전 서울시 교육감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고, 댓글을 통해 금년도 서울시 초등교원 선발인원이 전년대비 무려 88%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임용고사를 백일 앞둔 시점에서 발표했다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까. 특수목적대라 사범대에 비해 현격히 높은 합격률이 장점을 보고 고등학교 시절 높은 성적으로 진학한 교대생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것이다. 서울시 기준 105명 만을 선발한다고 한다.


이십 년 전 교대를 가는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닐 수 있다.


90년대 초반 대기업 월급 60-70만 원, 중소기업 월급 40-50만 원일 때, 공무원 월급은 20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예전 경기도 어느 지자체 7급 공무원 하시던 사십 대 주무관 이야길 들어보면, 이 분은 80년대 말 중소기업을 다니다가 공무원 시험을 그냥 봐서 붙었다고 하던데, 그때 이직을 왜 하느냔 이야길 들었다고 한다. 6급 하시던 오십 대 주무관은 충북의 어느 공고 3학년 때 단체로 버스 타고 공무원 시험 보러 갔다가 절반 이상은 합격해서 근무지를 선택하고 했다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공무원 급여가 많이 정상화되고, IMF가 지나며 직장의 안정성이 중시되기 전까지 공무원은 그다지 매력적인 직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대가 변하며 선호하는 직장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사회에 첫 발을 디딜 시점인 십 년 전에 인기 있던 직장은 공기업과 공무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기업이나 공무원이 되고자 하면 일정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보통 그 기간이 1-2년 정도는 소요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딱히 그런 무소득 상태를 유지할 여건도 되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추세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다소 존재했다. 내가 취업할 때 인기 있는 직업이, 과연 내가 퇴직할 때에도 인기 있을 것인가. 물론 사명감 때문에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가는 분들도 계셨지만, 일부 친구들은 그러한 곳에 가려는 이유가 단지 편해서, 근로시간 짧아서 인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렇지 않아도 불확실한 세계에서, 과연 그러한 단기적인 안정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건설회사였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뭐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였지만, 해외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처음엔 관리조직과 같은 큰소리 칠 수 있는 본사 부서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보다 보니 엔지니어는 그 실무업무를 하며 실력을 쌓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선 그 매니저의 길을 가겠는가, 엔지니어의 길을 가겠는가에 대한, 그러니까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의 갈림길의 차이이기도 하다. 각자 선택은 다를 수 있다.


전후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로 시작한 영국의 복지국가는 처음엔 잘 운영되다가 70년대 영국병으로 대표되는 방만한 공기업 운영 및 과도한 노조의 힘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처는 그 공기업들을 민영화시키고, 영국의 산업을 개편하여 제조업의 비중은 현격히 줄었다. 70-8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던 일본은 90-00년대 매우 낮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하며 가치관이 달라진 시대를 경험했다. 90년대 신흥국가로 각광받던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몰락했다. 그런가 하면 2000년대 각광받던 이머징마켓,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는 2008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언제 일어설지 모르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국가들의 미래도 이렇게 시대에 따라 운명이 변하는데, 그 어떤 직업이 30년 50년씩 좋은 직업일 수 있겠는가.


세상은 시간이 흐르며 많이 변화한다. 지금 당장 어느 한 학과나 직업을 얻는다 하여 그 안정이 30년 50년 갈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당장 90년대 공대에서 건축과나 컴퓨터공학과가 인기 있고, 기계과나 화공과는 인기가 없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정 반대다. 당시의 인기만 따라가면 아무리 커트라인 높은 점수의 학과, 아무리 들어가기 어려운 직장에 간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후회할 수 있다. 그러한 인기보다는, 나의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더 잘 살릴 수 있는 쪽으로 가는 편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실은 나는 비교적 수학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공대 안에서는 또 그렇게 엑설런트 한 수준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비교적 영어를 잘 구사하는 편이지만, 영어를 업으로 삼고 계신 분들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실력이다. 처음엔 그 어정쩡한 두 가지 실력으로 어느 방면에도 두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둘의 조합을 가지고 나의 경쟁력을 찾은 것이 해외건설 입찰이다. 이 건설 바닥에 비록 나보다 숫자 감각이 탁월한 사람은 존재해도,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존재해도, 나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숫자 감각과 영어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까 외국인들과 컨퍼런스 콜을 하면서도 수천억 원 공사비를 breakdown 하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논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이게 또 해외현장 경험이나 경력의 영역으로 가면 경쟁력은 더 올라가고.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직업의 근간이 되는 학과를 선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일이다. 각자 처한 환경이 달라 섣부르게 조언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현재의 인기만 보고 그 진로를 결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은 흐르고, 트렌드도 정책도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안정적이며 좋은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배경사진 참조: https://www.pexels.com/photo/black-and-gray-photo-of-person-in-front-of-computer-monitor-14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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