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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Sep 20. 2017

Reference의 필요성: 출근길 잡상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Reference에 조금 강박적인 면이 있는데, 사석에서 상대방이 잘못된 카더라 사실을 설파하고 있으면 몸이 가만히 있기 어렵다고나 할까. 이 때문에 종종 아내님으로부터 타박을 받기는 하지만, 한번 몸에 자리 잡힌 이 Reference에 대한 강박은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가방끈이 딱히 긴 것도 아니고, 논문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닌 내가 왜 이런 강박이 생겼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해외 건설업무를 시작하면서 생긴 것인 듯하다. 그러니까 국제입찰 공사는 국내공사와는 다르게 계약서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데, 이를 다 읽고 소화하는 것이 기본이 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일을 할 때 어떠한 자료를 만들거나 금액을 산출할 때 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계약문서 조항 하나하나를 고려하며 작성해야 하는데, 여기서 어느 누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해당 조항이나 도면, 그리고 시방을 들이대고 시정을 요구하면 상대방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상대방이 사원이든 부장이든 임원이든, 명시된 Reference를 들이대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중동에서 근무할 때 팀장님을 종종 사석에서 만나는데, 이 팀장님은 사내에서도 그 호랑이 같은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분이 나에게 종종하시는 말씀이, 너는 매번 나한테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서 다루기 어려운 후임이었다고. 평소 내 성격 같으면 까라면 까라고 뭐라고 했을 텐데, 매번 그 계약서의 일부를 들이밀며 반대의견을 제시하니 딱히 뭐라 하기도 어렵고, 그것이 결국 대외적으로 도움된 경우도 많아서 궁극적으로 일하기 좋았다고.


내가 국내 업무를 싫어하고 해외업무를 좋아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국내 업무는 관습과 위계질서에 의해 행해지는 것들이 꽤나 많이 있다. 무언가 할라치면, 에이-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거야. 그렇게 법대로만 해서 어디 사업하겠어? 소송 가봐. 판사가 니 편 들어주겠어? 이런 식이다. 1천억 원이 넘는 프로젝트 계약서가 수십 장에 불과하니 뭐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입찰을 하기도 전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Scope of work이 일목요연하고도 장황하게 정의 내려지고, Design이나 Material, Execution Requirement가 수백장에 걸쳐 정의 내려지고, 미리 Geotechnical Reference condition이나 Weather and Oceanographic reference condition 등이 상세히 제시되면 그러한 관습이나 갑을 위계질서에 의해 행해질 것들이 별로 없어진다.


문서보다 영상의 힘이 더 세지는 사회라고 한다. 어려운 벽돌 책보다 그 수십 권의 벽돌 책을 하나로 요약해 놓은 책들이 더 잘 팔리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고 문자화 되지 않은 것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워진다. 좋은 게 좋은 거라던 성장기 시기에는 다 같이 이익을 보기에 가능했을 법한 시스템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 손실을 보기 시작하면 시시비비를 따지기 어려워지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부디 한국사회도 이제는 조금 더 그 계약적인 마인드, 카더라를 믿기 전에 Reference를 한 번쯤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러면 얼마 전 240번 버스 사건과 같이, 그저 한쪽의 카더라 의견만 듣고 분노하며 버스기사를 해고하라는 청원 같은 무시무시한 실수는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 해고의 청원을 올리기 전에, 버스기사의 업무규정 및 매뉴얼, CCTV 등을 통한 사실 확인 등을 통해, 버스기사는 왜 해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게 상식일 것이다.


*배경 사진 출처: https://www.pexels.com/photo/yellow-tassel-159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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