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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Oct 08. 2017

[영화] 남한산성, 감독 황동혁, 원작 김훈, 2017

지극히 주관적 해석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홍타이지의 청나라는 현재의 중국, 명나라는 현재의 미국을 떠올리게 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롭게 떠오르는 국가, 그리고 점점 저물어 가는 국가. 결과를 아는 후대 사람들이 보기엔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겠지만, 당대의 임금과 신하들에게는 그것이 딱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중국과 미국이 떠올랐다고는 하지만, 작금의 시점에서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이 패권을 장악할 것인지, 미국이 계속 패권을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나도 전혀 할 수 없다. 그만큼 미래는 불투명하며, 그에 따른 판단은 늘 잘못될 여지를 남겨두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인조의 그 우유부단한 리더십에 지도자를 탓하는 정치인들도 많고, 척화파와 주화파를 모두 까는 정치인들도 많다. 하지만 영화는 그 주화론자 최명길(이병헌)과 척화론자 김상헌(김윤석)의 충정을 제대로 표현해 주었고, 어느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돌렸다고 생각한다. 뒤돌아보면 누군들 아무 말이나 못 하겠는가. 작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에도 딱히 정답이 없듯이, 당시 남한산성 안에서는 인조도 주화론자도 척화론자도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분노를 한다든지, 군주가 무능하면 피해는 백성의 몫이라느니 하는 뻔한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상당히 많은 분들은 병자호란의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하여 명분 대 실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런데 과연 당시의 척화론자들은 정말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명분만 내세운 이상주의자들일까. 조심스러운 해석이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는 겨울은 1636년인데, 명나라가 멸망한 해는 1644년이다. 명나라는 1368년 이후 277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했고, 실제로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도 홍타이지의 청나라 때문만은 아니고 이자성이라 하는 농민군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1636년만 하더라도, 아직 명나라의 숭정제는 대국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홍타이지도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인 1643년에 뇌출혈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시대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인조를 두고 광해군과 같이 실리외교를 못했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당장 광해군이 그 실리외교를 하다 서인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던 사실을 보면 대내외적으로 그러한 양다리 외교정책이 어려웠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화론자와 척화론자의 토론이 이어지는데, 그 숨 막히는 토론 속에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대신들, 그들의 충절 역시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극 중에서는 영의정 김류가 인조에게 대신들에게 묻지만 말고 임금이 판단 좀 하시라고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 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던들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의문이다.


사실 당시 지구 반대편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1516년부터 1830년까지 아랍세계를 제패했는데, 이 시기에 현재의 모로코나 알제리, 리비아는 물론 과거 대제국이었던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국가들, 시리아, 이라크, 멀리 유럽의 그리스 및 크로아티아, 헝가리 지역까지 상당 수의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편입된 바가 있다. 이 시기에 언급된 그 수많은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과연 실리적인 외교를 한다고 하여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오스만 제국도 사실 따지고 보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튀르크 족이 동로마제국과의 전쟁을 하나하나 이겨가며 성장한 대국이다. 뭐 본조가 없기로는 후금, 그러니까 누르 하치로 시작한 청나라와 별반 다를 바 없는데, 당 대의 뿌리 깊은 국가였던 동로마제국이나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헝가리 왕국, 그리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및 이라크, 예멘, 리비아, 알제리 등의 국가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을까. 이는 어쩌면 외교로 풀 수 없는 대세적인 흐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편도, 소련의 편도 들지 않으며 중립외교만 고집하는 국가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설령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지 않고 그 중립외교를 한다고 고집했다면 과연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운이 없다면 마오쩌뚱의 중공으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고, 잘 되어봐야 미얀마나 타이 정도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조지 워싱턴대학의 그렉 브라진스키 교수가 쓴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따르면 1960년도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경제원조만 3억 8천만 달러였다고 하는데, 이는 미국의 해외원조 전체 액수의 약 7.6퍼센트라 한다. 당시 북한도 소련에게 원조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냉전의 첨병 속에서 남한과 북한은 운이 좋게도(?)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쉽지 않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현재의 국제관계가 떠오르며, 당시 인물들 간 명 한 명의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다 보고 나니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는 것을 인지했을 정도다. 영화는 그렇게 몰입감이 뛰어나고, 김훈 작가의 문체만큼이나 군더더기 없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국제정치 역학관계. 그 어렵고도 기묘한 함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까. 차라리 척화파나 주화파, 혹은 우파나 좌파, 어느 한쪽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어딘가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나의 시각이 이럴 땐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노르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그 해양 지정학적 중요성 측면에서 나치는 1940년에 점령하게 된다. 입으로만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오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냉엄한 국제관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작금의 한반도, 남한에서 우리의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나친 명분에 대한 집착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며 미래를 대비해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산한 가을 저녁, 그렇게 고민은 깊어만 간다.


책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영화 또한 당대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측면에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극적 효과를 위해 실제 역사와 다소 다른 부분도 있지만, 본 영화를 바탕으로 문헌을 통해 그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관객의 몫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 남한산성은 추천하고 싶은, 그런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최근 십 년 동안 본 영화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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