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가면, 지금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몇 층을 가느냐고 물어보고 층수를 눌러주는 아저씨, 버스를 타면 버스요금을 받아주는 아저씨(카드 단말기도 들고 다니시더라), 백화점에 가면 공항검색대와 같이 몸과 가방을 수색해주시는 아주머니, 각 매장마다 지키고 있는 가드 아저씨, 드라이버는 디폴트로 장착하여 차를 보내주는 렌트카 아저씨, 슈퍼에서 구매한 물품을 포장해주고 자동차까지 실어다 주는 아저씨, 심지어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들까지, 정말 다양한 직업들이 넘쳐난다.
이러한 직업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분들을 고용하더라도 영업비용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을 고용했을 때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높은 북유럽으로 가자면, 공항에 가도 딱히 짐을 들어주는 분들도 없고, 티케팅을 해주는 데스크도 없고, 개발도상국 공항에 흔한 릭샤나 택시를 대기시키고 진을 치는 분들도 없다. 호텔이나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더라도 사람이 나오지 않고 비번만 알려줄 수 있으며,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가 없이 그저 RFID로 요금만 정산될 뿐이다. 당연히 렌터카를 빌리면 내가 운전해야 하지 누군가 드라이버를 고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루 렌터카 비용의 두세배를 지급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나라가 전자보다 후자의 나라가 되길 원한다. 물론 총론에서는 후자의 나라가 훌륭하겠지만, 각론으로 가자면 전자의 나라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가 서남아시아에서 북유럽으로 급격히 변화하면 앞서 언급한 직업들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것이 과연 누구에게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며 단점이 될 것인가. 사회의 경제가 발전해 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겉모습이 변화해 나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직업이나 사고의 틀은 변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만 해도 벌써 GDP per capita 가 1,870불 수준에서 태어나서 지금 3만불 대에 이르렀으니, 그 길지 않은 시간의 사회가 같은 사회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만 하더라도, 친구네 집에 가면 거실 바닥에 담배빵 자국이 가득했고, 시외버스를 타면 옆자리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고 좌석 뒤 재떨이에 재를 뿌리는가 하면, 백화점엔 엘리베이터걸 누나도 존재했었다.
물론 정수기를 사용하는 사람도 없었고, 에어컨은 사치재였고, 컴퓨터 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공문서를 손으로 작성하셨다. 만약 그 시절 기준으로 내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면 얼마나 시각이 제한적이었을까. 당장 당시의 공문 잘 쓰는 직원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었겠지만, 현재는 워드나 엑셀을 잘 다루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subtotal, sumif나 vlookup과 같은 함수만 다뤄도 고냥저냥 평타치는 직원이었겠지만, 앞으로는 파이썬이나 구글앱스 스크립트 정도는 다뤄야 평타치는 수준일 수도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한 시대라 할지라도 공간에 따라 각자 보이는 모습이 상이하다. 여기서 우리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교육일까 대안학교일까 사교육일까 무엇일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추세로 보자면,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대안학교든 뭐든, 아이들이 무언가 자기만의 주특기가 없으면 먹고살기 어려워질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복지국가로 가자면 사회안전망은 유지되겠지만, 단지 그 안전망에 기대어 사는 분들의 삶의 만족도가 그리 높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구성된 북유럽이라 할지라도 내가 콘크리트를 생산하기 위해 골재나 모래, 시멘트를 대량구매하갰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비행기타고 한국으로 오실 분들이 상당하다. 그렇게 그 분들도 좋은 사회에 거주하기는 하지만, 회사의 매출을 늘리고 영업이익을 늘려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목표는 비슷한 것이다. 워렌버핏은 주주서한에서 자신이 보유한 회사의 CEO는 이미 부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일에 흥미를 잃을 위험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일을 사랑하고 탁월한 실적을 통해 전율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뭐 정말 이들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가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아무리 늘더라도, 각자 자기 직업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직업의 종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그러한 흐름에서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제공해야 할 것인가. 그저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경쟁에 노출될 아이들을 이십년에 걸쳐 서서히 경쟁의 장에 내어 놓는 것. 그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의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