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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Feb 09. 2016

초단편소설 : 빗속의 기억, 중동 저 어딘가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몸이 흙탕물 속으로 빠져 들었고, 이 구덩이는 그 깊이가 얼마인지 머리 끝까지 잠겼음에도 발은 땅에 닿지도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소설 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수천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가진 않았고, 과부가 될 수도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어린이 집에 다니는 아들. 미안했다.



중동에 온 지 6개월 차, 여태 비는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지천엔 풀 한 포기 없었고, 파란 것은 하늘, 노란 것은 땅이었다. 태양은 드넓은 인도양 수평선에서 떠서, 등 뒤로 보이는 병풍 같은 산맥으로 지곤 했다. 처음엔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제 슬슬 일도 할만했다. 처자식 떼어 놓고 온 이역만리 타국이었지만, 인도 영어도 슬슬 익어갔고 수신호로 인도 노무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익숙해져 갔다.


영국인 감독은 오늘도 지적질 이었다. 포크레인으로 판 구덩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되느냐. 구덩이 주변에 안전표시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나 장비가 지나가다 빠지지 않겠느냐고.  그놈의 영국 악센트는 매번 들어도 재수없다. 대관절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나. 하려고 했다니까 그러네. 지나가는 인도인 노무자에게 어서 철근이라도 구해와서 구덩이 주변에 띠를 두르라고 지시했다. 바다 저편에서 왠지 둔탁한 구름 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온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얼마 온 것도 아닌데, 물이 심상치 않게 불어 갔다. 아마도 등 뒤로 보이던 병풍 같은 산맥으로 떨어진 비도 점점 바다로 흘러가나 보다. 비가 오면 공사장 비탈면은 위험하다. 물길을 터 주어야 한다. 적어도 산맥으로부터 흐르는 빗물은 물길을 따라 바다로 보내버려야 한다. 하이바를 집어 들고 길을 나섰다. “그래, 물길만 터주면 돼. 어서 마치고 오자.”


저 멀리 인도인 포크레인기사가 철수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 물길만 터주고 철수하자고 수신호를 보냈다. 이를 본채 만채 포크레인기사와 조수는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제 물은 불어 슬슬 땅은 흙보다 물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사가 있는 곳엔 물이 조그만 폭포와 같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더 바삐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물길만 트고 가면 돼.”


물구덩이에 빠진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파 놓은 구덩이었지만, 안전띠도 없었고, 물이 불어 이게 땅인지 구덩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던 때였다. 내리치던 빗방울 소리도 안 들리고  고요해졌다. 정신도  아득해졌다. 흙탕물이라 눈을 떠도 앞이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억울했다. 지하철에서 누구를 구하다 죽은 의인도 아니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다 죽는 것도 아니다. 발을 잘 못 디딘 것뿐인데. 물길만 트고 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 이제 내 아이는 어떻게 커야 하나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인기척, 아니 기계 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잡히는 것 같았다. 포크레인의 바스켓이 손에 잡혔다. 이내 나는  물속에서 건져 올려졌고, 다시 빗발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인도인 관리자의 호통 소리. 인도 악센트가 저리도 반가울 수가. 세상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다시 만난 세계였다. 빗소리, 싱싱한 공기, 그리고 손으로  매만져지는 흙 입자.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얼굴에 흐르는 액체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렇게 웃음은 다시 내 얼굴에 찾아오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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