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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Feb 29. 2016

움베르토 에코를 기억하며

몇 주 전 움베르토 에코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분들이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겠지만 저에게 있어선 언뜻 생각나는 사람은 한국에선 김대중, 노무현, 리영희, 신해철, 외국까지 보자면 스티브 잡스, 마이클 잭슨, 존 레넌  정도입니다. 물론 몇 주 전 작고하신 에코 할아버지(이하 에코 옹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도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입니다.



제가 에코 옹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모두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군대에서 제 사수 때문이었다. 같은 학교 예술학과를 다니던 그 사수는 보통의 선임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친절하고, 착하고, 잘해주고, 그렇지만 무언가 자신의 세계관이 확고해서 편하지만은 안았던. ^^; 사단장실에 둘 밖에 없어서 근 24시간을 매일 같이 지내곤 했습니다.  그즈음 그 사수가 보던 책이 에코 옹의 책들이었습니다. 매일 업무시간이 끝나면 독후감인지 책 해설서인지 무언가를 워드로 뚝딱거리며 치고 있었고, ‘장미의 이름’부터 ‘푸코의 진자’, ‘바우돌리노’ 등의 책들을 몇 달 동안 섭렵해 갔습니다. 당시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있기는 있는 책이려니…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중동으로 발령 나서 짐을 싸는데, 뭔가 몇 날  며칠을 읽어도 다 못 읽을 책이 필요했습니다. 중동에선 한글이 그리울 테고, 쉬운 책은 금방 읽으니 좀 읽어도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를만한 책, 그런 책이 필요했습니다. 서점에서 다시 만난 에코 옹은 그때였지요. 장미의 이름 두 권을 캐리어에 넣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장, 두 장을 넘기면서 에코 옹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장미의 이름’은 저의 인생관을 돌려놓은 명작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온 저는 다소 편협한 수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리는 당연히 있는 것이고, 물론 그 진리는 교회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선 뉴에이지 음악, 록 음악도 멀리 했으며, 맥콜은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가면서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영미권 어학연수 및 이슬람 문화권에서의 근무를 통해 그 견고했던 가치관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신앙을 잃지는 않았지만, ‘교회’라는 인간의 모임에 대해선 조금은 절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겠지만 사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외에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이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The Name of the Rose...


‘장미의 이름’의 배경은 중세 수도원입니다. 윌리엄 수사라는 영국 출신의 탐정급 주인공이 등장하며, 견고한 중세 수도원의 노수도사 호르헤가 그 대척점에서 등장합니다. “웃음은 우리에게 해악인가?”라는 주제로도 둘은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특별히 ‘이단’에 대해서도 논쟁을 합니다. 그 당시 수도회의 교리로는 웃음은 허약한 것이며, 부패한 것이고, 심지어 악마의 바람이라는 등의 이유로 웃음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독약을 통한 살인이라는 방법을 통해 비밀을 지키려 하지요. 그런데 중세 수도원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거대한 수직적 사회 속에서 ‘진리’라는 겉옷 속에 숨겨진 인간 이면의 세계를 밝혀내는 윌리엄 수사를 보면서 제 속에 자리 잡은 ‘중세 수도원’적인 세계관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사실 지금의 한국 대형교회도 중세 수도원과 많이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유럽여행을 하거나 TV에서 가끔 나오는 중세시대 명화를 보면 대부분 기독교 그림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하기 전까진 책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신부나 수녀 등의 성직자를 통해 성경을 이해했으며, 그 과정에서 교회의 벽화 등을 통해 조금 더 쉽게 이해하였다고 합니다. 헌데 이게 1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교회라는 권력이 생겨나고 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강고한 체계, 그리고 그 체계를 무너트릴 수 없는 제도, 암투 등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고, 대중에게 공개하길 꺼려하고, 선동하고, 돈을 걷고. 사실 이게 동서양 혹은 과거 미래 언제든 있던 레퍼토리긴 합니다. 권력을 쥔 소수의 자들이 똑똑한 대중의 출현을  무서워하는 것 말이지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시에도 그랬고, 냉전시대 메카시즘이 출현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몇몇 교회 목사님들은 교인 각자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성경공부는 교회에서만 해야 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맥락은 이해하지만, 그건 절대적으로 옳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장미의 이름’에는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의 조수 ‘아드소’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저는 제가 아드소인  것처럼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괜찮은 소설이고 소장가치도 충분히 있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는 분들은 언젠가 읽어보실 것을 권하며, 아주 예전에 숀코네리가 주연한 영화로도 나오긴 했는데, 윌리엄 수사의 추리력을 느끼길 원한다면 그래도 소설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바우돌리노 및 푸코의 진자도  사놓고 읽으려 했지만, 이건 아직까지 다 읽지 못했습니다. 에코 옹이 본디 기호학자이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 대략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여하튼 여태껏 쓰신 소설 및 다른 작품들도 내가 즐거운 숙제로 기꺼이 언젠가 읽어볼 것입니다. 많은 것을 남겨주셔서 감사하며, 편히 쉬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배경 사진 출처 : www.theguardian.com/books/2015/may/07/how-to-write-a-thesis-umberto-eco-review-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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