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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May 25. 2016

급격한 진보를 경계하며

Radical이 아닌 Progressive를 꿈꾸며

필자는 다니는 회사 노조에 소속되어있다. 관리자라 할지라도 어쨌든 임금근로자의 한 사람이며, 헌법에 명시된 단체교섭권이 가끔은 필요하다고 보는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진보는 경계하는 편이다. 진보적이다라는 말은 영어로 Progressive 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불어인 progressif에서 파생된 단어로, 역사가 4백 년도 채 안된 비교적 신생 단어다. 단어의 뜻은 '점진적인, 꾸준히 진행되는'이다. 영어로 표현해 보자면, Happening or developing gradually or in stages.
이 progressive와 그 쓰임은 간혹 중첩되지만 결을 달리해야 하는 단어가 Radical이다. 이 radical 이 내가 경계하는 '급격한' 진보이다. 뜻을 찾아보자면, '근본적인, 급진적인, 과격한' 등등 내가 멀리하는 단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급격한 진보는 굳이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지 않고 산업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해외건설 매출액 추이를 한번 보자.

출처 : 국토교통부

1970년대부터 100억 불(약 12조 원 수준) 언저리에서 등락을 반복하던 해외건설 수주액은 2007년에 들어서서 무려 200% 이상의 성장을 보여줬다. 결국 2010년엔 700억 불을 넘는 성과를 달성하고 현재는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천문학적인 수업료를 납부하고 다시 반토막의 수주액으로 쪼그라들고 있다. 아무리 기반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건설업이라 할 지라도, 수십 년간 12조 원 수준의 일감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80조 원이 넘는 일감을 어떻게 단숨에 소화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한국의 건설업은 아파트나 인프라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는데, 저 700억 불의 해외건설을 이끈 건 단연 플랜트/ 발전 산업이었다. 전문가는..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은 저 수업료로 전문가군이 좀 생겼다 보는데, 이제는 일감이 줄어들고 있다. 이 역설적 상황이란)




물론 건설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한국 요구르트의 자회사인 '팔도'의 매출 및 영업이익 현황을 보자.

팔도는 2011년에 출시된 꼬꼬면의 열풍으로, 한국 요구르트로부터 2012년 '팔도라면'으로 분사했다고 한다. 당시 꼬꼬면은 정말 마트에 도착하는 족족 다 팔려나가는 히트상품이었다. 위키백과에서 찾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상품화의 주역인 한국 요구르트 OOO 차장은 "마트 직원이 꼬꼬면을 실은 카트를 끌고 오면 라면을 진열하기도 전에 손님들이 다 집어가 버리는 정도의 인기"라고 설명했다. 꼬꼬면 덕분에 라면업계 매출 서열 만년 꼴찌 탈출은 물론이고 잘 하면 2위도 가능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2011년 12월에는 꼬꼬면의 성공에 힘입어 OOO차장은 마케팅부문 팀장으로 승진하고 상당한 성과급을 받았다.


꼬꼬면 열풍에 힘입어 팔도는 생산라인을 증설했고 더 많은 꼬꼬면을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첨부 그림에 보이는 영업실적은 어떠한가. 1년 만에 매출 200%가 넘는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은 (-)를 기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2년 부채가 2배 이상 되는 것으로 보아, 공장증설을 위해 부채를 많이 가져다 쓴 것 같다. 헌데 2012년 그 큰 차입된 금액으로 발생한 이자비용은 2013년에 재무제표에 반영되어 당기순손실이 폭이 확 커진 것으로 보인다. 당기순손실율이 무려 10%가 넘는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가끔 티라노 킹이나 터닝 메카드 품절사태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업체들을 비난하는 몇몇 부모들을 본다. 기업이 더 많이 팔 수 있으면서 일부러 이러한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하지만 제조업은 그 태생부터 재고와의 싸움이다. 공장을 쉽게 증설하여 물량을 늘렸는데, 재고가 쌓이기 시작한다면 그 공장을 짓는데 들어간 비용 및 고용된 인력의 고정비용 등을 감당하기 어렵다. 수요는 간혹 밴드웨건 효과와 같이 유행에 따라 상품을 구입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현상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질 수 있다. 지금 마트 완구코너에 한번 가 보시라. 메카니멀 수백 마리가 주인을 찾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다.




내친김에 역사까지 한번 가보자. 어제 존경하는 페이스북 친구분 중 중국에 관한 포스팅이 있었는데, 여기서 잠시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설프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는 일부 역사책 보다 통찰력 있는 SNS의 글이 때론 더 값어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1940년대 국공내전 전후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며 우왕좌왕하는 국민당과 장개석에 염증을 느끼고 보다 화끈하고 급진적인 진보와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공산당과 모택동을 열렬히 지지했던 당시 중국 진보적 지식인 계층과 고학력 엘리트들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그들의 진보적 열정과 양심적 동기에 의한 선택이 중국 전 대륙을 수 십 년 간 극도로 봉건적이고 전제적이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지옥 같은 상태로 몰아넣은 극악한 공산 독재자의 폭정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사의 진보와 발전이 오로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선의만 비례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명쾌하고 단순하겠나,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역사와 인간 사회는 훨씬 복잡하고 난해하다.


중국을 비롯해 구소련과 북한이 보여준 급진적 진보의 끝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는 progressive 라기보단 radical 쪽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7주기가 있었다. 내가 노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왼쪽 분들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지만, 막상 그 지도자의 위치에선 상당히 실용적인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물론 인권이나 권위주의, 친일 타파 측면에선 다소 급진적으로 보일만큼 진보적이었지만, FTA나 공무원 연금개혁, 등에서 보여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상당히 시장주의적이었다. 물론 그놈의 신자유주의 때문에 대부분의 진보언론 및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급격한 진보는 위험하다. 세상은 생각보다 그 톱니바퀴가 잘 끼워 맞춰져 돌아가고 있다. 그 톱니바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저거 다 잘못됐어! 음모야! 이렇게 치부하면 곤란하다. 90년대만 생각해도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었다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공식적으로 펀드도 마련하고 능력이 있다면 뒷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정치할 수 있는 시대다. 김영란법도 시행된다 한다. 내가 업계에 발을 들인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법의 시행이다. 이렇든 우리 사회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절로 된 것도 아니다. 작금의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같은 데를 보면, 그래도 우리는 지도자를 잘 뽑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좌나 우나 말이다.


자기는 짱돌을 들 용기도 없으면서 청년들에게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라는 어른들은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작금의 청년들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짱돌을 들고 나온다고 해결되지 않는 전 지구적 문제일 수 있다. 단적으로 스페인의 청년실업률만 봐도 45%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점진적으로, 꾸준히 진보되는 사회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그게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인이든, 잘 한번 찾아가 보자. 이젠 어디 따라 할 만한 선진국 모델도 없다. 우리끼리 머리를 잘 맞대어야 하지 않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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