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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outjina Nov 13. 2019

오늘을 위한 시간

2019.10.11~2019.10.14 하노이 여행기

벌써 떠나는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4일은 정말 빨리 지나가는구나. 최근에 이렇게 짧게 여행한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정말 여유가 없었다. 사실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 일어나서 가볍게 걷고 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보고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여유롭게 발레 공연을 보는 것이 모두 하노이 일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모두 실천하진 못했다. 실천을 못했다기 보단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하노이를 만난 후에 일정 전면 수정이 필요했다. 이곳에선 그렇게 즐기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하노이에 왔으면 하노이와 함께 즐겁게 노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계획과 뜻밖에 즉흥적인 일로 하노이에서의 추억이 쌓여간다. 



3일차 : 오늘을 위한 시간

내일을 위한 시간(2014)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산드라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딱 이틀 동안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는 복직을 앞둔 산드라와 일하는 대신 동료들이 보너스를 받는 것을 선택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공정하지 못했던 투표로 인해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결정이 되고, 일자리를 되찾고 싶었던 산드라는 주말 동안 동료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각자 모두 사정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에게 보너스를 포기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 만남들은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산드라가 내 '일'이자 '내일'을 위해 만난 사람들

내일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산드라'를 보여주는 영화. '내일'의 시간을 살고 있었지만 이제는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살고 싶은 나에게 찾아온 영화이다. 산드라는 내일이라는 전쟁 같은 날을 위해 오늘도 처절한 하루를 보낸다. 어쩌면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이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사람들을 만나며 때로는 애원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찾아올 내일이기에 그들 또한 포기할 순 없다. 영화는 계속 '산드라'의 오늘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오늘은 정말 내일을 위한 시간일까?


불행하게도 우리의 오늘은 단지 지금 이 순간으로만 존재하긴 어렵다. 우리에겐 매번 내일이 찾아오고 힘들더라도 우린 그 미래를 준비해야 하니깐. 욜로? 현실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내일이 없어졌다고 했던 나에게도 실제로 미래가 사라진건 아니었다. 그저 바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온 내게, 바쁜 내일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며 살아왔던 내게 오늘의 텅 빈 시간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많은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나를 잃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텅 빈 오늘을 채우는 연습이 필요했다. 가급적이면 색을 잃은 나의 본모습이 나오는 방향으로 말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살아보자 다짐했지만 당분간은 또 내일을 위한 시간으로 이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이 영화의 산드라가 행복하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던 것처럼 이 여행이 마무리될 때쯤 나도 그렇게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


평화로운 호안끼엠 호수

사실 계속 계획하고 있었던 호안끼엠 호수지만 이렇게 늦게 오게 될지 몰랐다. 심지어는 호텔을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호수이다. 하노이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다. 물론 사람들도 많고 엄청 복잡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바람도 살랑살랑,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으니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졌다. 어제 계획했던 대로 오늘은 책을 읽어야지. 하노이에 가지고 왔던 3권의 책 중 가장 이곳과 어울릴 것 같았던 '처절한 정원'을 꺼내 읽었다.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책도 좋고 호안끼엠도 너무 좋다. 순간 호안끼엠을 보기 위해 이곳에 한 번 더 오고 싶어 졌다.



해가 지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하늘.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답다.
밤의 성 요셉 성당과 밤에 더 화려한 맥주거리.

이렇게 하노이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러간다. 짧은 3일의 여행이었다. 무엇을 많이 하기도 무엇을 많이 하지 않기도 한 하루의 시간들이 모두 즐겁고 신나는 순간들이었다. 역시 나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것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순간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순간들. 왜 이렇게 단순한 것을 잊고 살았을까. 아니면 늘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내일을 위해 바쁜 나를 위한 핑계. 이제 나에게 바쁜 내일은 사라졌으니 더 이상 핑계 대지 말아야지. 


오늘의 영화, 책 모두 만족스럽다. 그리고 하노이는 더 더 만족스럽다.



3박 4일 하노이의 일정은 이렇게 모두 마무리되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난 어김없이 또 출근하긴 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트렁크는 무척 무거웠지만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하노이 여행 전부터 여행 계획보다 영화와 책 고르는 것에 집중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많이 즐기지 못했던 것을 더 많이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몇 가지의 책과 영화는 100퍼센트 만족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좋은 시간이었다. 소소한 행복을 매 순간 온전히 느끼면서 살기는 쉽지 않다. 행복보다는 짜증이, 만족감보다는 스트레스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더 압도하기 때문이다. 원래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우리에게 더 인상 깊게 남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늘 행복을 찾는다. 내가 이 여행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나는 이 여행에서 행복을 찾았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11월 13일. 하노이 여행이 끝난 후 딱 한 달이 지났다. 난 하노이에서 결국 행복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찾으며 살고 있다. 1년 동안 쓰지 않았던 글을 하노이 이후에도 계속 쓰고 있으며, 하노이 여행 후에 2권의 책을 더 읽었고 종종 보던 영화를 요즘은 좀 더 자주 보고 있다. 1년 동안 끊었던 SNS를 다시 시작했고 이제는 그곳에도 종종 글을 올리려고 한다. 이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더 하자면 이전보다 술을 즐기고 있다는 것? 요즘은 와인이 좋다. 난 요즘 그렇게 즐기며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 그건 지금 이 순간.


그렇다면 난 또다시 하노이를 가게 될까? 
흠 글쎄... 그건 시간이 좀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하노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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