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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outjina Dec 18. 2019

너와 함께하는 여섯 번째 제주도

전지적 이모 시점 Part 1

Prologue

이 글은 제주도를 여행하기 전부터 구상했던 글이다. 제주를 수 없이 오갔지만 한 번도 그 여행을 남긴 적은 없었다. 제주 여행은 나에게 일상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때로는 글이 이렇게 나에게 먼저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 제주도 여행은 남기고 싶을 만큼 최고의 여행은 아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기기엔 너무 최악이었다. 어쩜 이렇게 힘들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모두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여행이었다. 여행 시작 전에 구상한 글이니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여행기를 남겨야 할지 아직도 많이 고민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시작했다. 원래 여행이란 늘 그런 것이기에, 그리고 육아란 원래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에. 아마 밝고 즐거운 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꾸미지 않고 거짓을 넣지 않고 노골적으로 모두 써볼 생각이다. 과연 이 글은 어떤 글이 될까? 아직 그 답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멋진 추억이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타인의 것이던 육아는 종종(때로는 조금 자주) 나를 찾아온다. 그렇다고 그것이 온전히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충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무게 덕분에 현재를 살고, 누군가는 그 무게를 견디며 살고 있다. 늘 그 무게로 보호받으며 살았던 나에게 2016년, 아주 귀여운 조카가 생겼다. 육아라는 짐으로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일이 이렇게 운명처럼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육아, 그리고 마낭 신기하기만 했던 육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현실이라는 어두운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아이의 성장은 행복과 함께 늘 불안함을 동반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 아이는 눈에 넣지 않고도 나를 아프게 만드는 악동이 되어갔다. 작고 귀여운 이 악동을 사람들은 흔히 미운 4살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누가 밉다 말할 수 있을까.(우리 언니는 미운 4살보단 절교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난 이 표현을 참 좋아한다.)


조카의 4년 성장은 이러했다. '나는 절대로 육아는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1살을 무사히 넘기고, 벌써 다 큰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던 2살을 지나, 혼이 나갈 것 같았던 3살이 끝나고, 이제는 어엿한 숙녀 같은 4살의 끝자락에 와있다.(해가 지나면 조카는 벌써 5살이 된다.) 나는 매 해 조금씩 늙어가지만,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이 아이는 성장이라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린 이렇게 같은 시간을 다르게 소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의 이 성장이 곧 나와 같이 늙어가는 시간이 될 때쯤, 이 아름다운 시간은 영영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의 이 시간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역시 기억의 오랜 간직은 기록뿐일 것일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 순간을 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4살 12월에 찾아온 조카의 겨울 제주를 담기로 결심했다. 올 때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감상을 주는 제주도에서 우린 또 어떤 시간을 공유하게 될까?



우리 제주도 멤버 구성원은 이렇다. '육아가 체질인' 우리 엄마, '현재 육아 진행형'의 우리 언니, 그리고 '그냥' 나(솔직히 말하자면 늘 조카를 가장 흥분하게 만드는 주범), 그리고 '그 중심'에 조카가 있다. 이번 제주도가 조카에게는 10번째 제주,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은 6번째이다. 12월의 제주도는 오랜만이었다. 추울까 봐 걱정이었지만 겨울에도 늘 따뜻했던 제주도이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발 전부터 감기에 걸렸던 조카는 이날도 역시 감기와 함께 제주도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올 해는 강아지 '꼬미꼬미'도 함께 했다.


오랜만이야 12월 제주.

조카와 함께하는 12월 제주는 2년 만이었다. 사실 겨울 제주를 좋아하진 않지만 12월에 어딘가 떠난다는 것은 늘 신나는 일이다. 연말의 느낌과 함께 크리스마스의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가 들고 이제는 큰 감흥이 없어진 크리스마스지만 조카가 태어나고 크리스마스는 또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12월이면 함께 트리를 꾸미고,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이야기하고, 연말에는 조촐하지만 케이크에 불도 붙이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 나의 어린 시절과 똑같다. 이렇게 설렘은 촛불처럼 완전히 꺼진 줄 알았다가 다시 피어오르기도 한다.


요즘 제주 공항에는 이렇게 이쁘고 큰 트리가 장식 되어있다.


아이와 함께하는 겨울 여행의 가장 큰 단점은 옷을 입히는 것이다. 원피스 하나에 샌들을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는 여름과 달리, 겨울은 옷을 입고 나가는 것부터 전쟁이다. 내복을 입히고 두꺼운 옷을 입히고 겉옷까지 입히고 나면 아이도 어른도 나가기도 전에 벌써 초주검이 된다. 또 차를 타고 내릴 때마다 겉옷을 벗겼다 입혔다... 그리고 안 입겠다고 도망가는 조카를 보고 있자면 정말 여름이 간절하다. 이번 제주도에서 또 한 번 다짐했다. 절대로 겨울 여행은 다시 하지 않기로... 이렇게 우리의 옷 입기 전쟁은 여행 7일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역시 여름이 간편해서 좋아.


늘 눈치를 봐야 하는 순간.

제주를 여행하면서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곳, 새로운 맛집을 찾지 않게 됐다. 최근에는 새로운 곳보다 익숙한 곳과 더 친해지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도 새로운 맛집이나 장소를 찾지 않고 갔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맛집을 발견했다. 요즘 한창 유행인 '카페 차롱'이다. 이 만남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언니의 배고픔에 근처 맛집을 찾다 발견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조카도 좋아했다.


이쁜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 자극적이지만 깔끔하다.


이곳의 단점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밥이 나올 때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친구들끼리나 아이가 없는 가족들끼리의 1시간 30분은 10분처럼 지나갈 수 있지만, 아이가 있는 1시간 30분의 기다림은 마치 10시간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렇게 인테리어를 이쁘게 해 놓은 카페나 조용한 식당에서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늘 제주도에서 음식점이나 카페를 찾을 때는 이곳이 '노키즈존'인지 아닌지를 필수로 함께 검색해봐야 한다. 다행히 이곳은 아니었다. 겨울의 단점은 이곳에서 또 한 번 튀어나왔다. 춥지 않은 날이었다면 이곳의 대기시간을 들은 순간 밖으로 조카를 데려갔을 것이다. 돌멩이를 구경하고 나무에 걸린 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때웠겠지만 칼바람이 부는 이곳의 날씨에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1시간 30분이란 시간을 4살짜리의 아이가 우리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길 바랄 수는 없다. 아이가 얌전히 기다려주길 바란다면 그건 어른들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잠시 다른 곳에 아이의 관심을 돌리고, 잠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간식을 먹고, 남은 한참의 시간은 결국 핸드폰을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것은 내가 편하자고가 아닌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많은 갈등을 하게 한다. 아이의 난동을 내버려 두기엔 타인의 불편함이 신경 쓰이고, 또 핸드폰을 보여주는 개념 없는 어른이 되기엔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이건 나만의 고민은 아니겠지. 아이를 키우는 모든 어른들의 고민일 것이다. 무게는 이렇게 또 한 번 나를 괴롭힌다. 그렇다면 이곳의 많은 어른들은 이 무게를 어떻게 견딜까. 그들의 선택이 궁금하다.


이곳에는 조카와 커플 패딩을 입고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강아지 때문에 잠깐은 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조카는 강아지를 무서워했다. 옆으로 강아지가 지나가면 기겁을 했고, 강아지를 마주치면 울면서 안아달라고 했다.(그런 모습은 어릴 때의 언니를 닮아있다.) 그런 조카의 강아지 공포증은 옆집 강아지로 인해 많이 사라졌다. 조카의 옆집에는 강아지가 살고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웰시코기이다. 잘 짖지 않았던 그 강아지는 한동안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 다녀온 후,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큰 목청으로 짖기 시작했다. 방충망을 늘 닫아놨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아지의 목소리는 그 문을 뚫고 우렁차게 튀어나왔다. 그 강아지가 짖고 난 후부터 조카는 그 집 앞을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늘 그 집 앞까지 뛰어간 후, 그곳에서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 때로는 안아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우린 그 강아지가 짖는 것을 말릴 수 없다. 아이들의 난동을 우리가 제어할 수 없듯 강아지가 짖는 것 또한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 강아지를 오래 키운 결과 알게 된 일이다.(조금 짧게 짖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이의 공포를 없애는 쪽이 현명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린 조카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목줄은 한 강아지는 괜찮아.', '강아지는 친구야.', '만지지만 않으면 돼'.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반복은 좋은 교육이다. 결국에는 효과가 있었다. 강아지가 보일 때마다,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카는 나에게 '강아지는 친구야? 강아지는 내 친구야? 괜찮아?' 반복적으로 물어봤다. 이것은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되뇌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번 제주도에서는 이모네 집에 있는 강아지를 가까이서 만질 수 있을 만큼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아이들은 매일 배우고 성장한다.


사실 옆집 강아지 이야기에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더 있다. 언니와 같은 층에는 조카보다 1년 정도 어린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역시 그 아이가 지나다닐 때마다 옆집 강아지는 우렁차게 짖어댔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목소리에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그날 저녁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옆집으로 가 강아지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 했다. 사실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강아지가 짖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이었고 혹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방충망이 아닌 문을 닫아달라는 말이었다. 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강아지 주인은 그날 처음으로 아이의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이렇게 이웃은 처음으로 언짢은 말을 주고받았고, 그곳에 배려와 양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던 우리는 마음으로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서로가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옆집 강아지 주인의 마음이 마치 카페에서 늘 눈치를 봐야 하는 나의 마음과 같아 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려를 필요로 하고 우린 그 양보에 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보받고 싶고, 배려받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이 일을 통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 어른의 호들갑은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카의 강아지 공포증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어른들의 태연함이 아니었을까.


카페 차롱 창문 밖으로 보였던 귤 나무. 이곳은 다시 한번 방문할 의향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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