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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outjina Jan 14. 2020

고흐에게 가는 문

<고흐, 영혼의 문에서>

일 년을 기다린 영화이다. 미국에서 2018년 12월에 개봉한 것을 보고 기다린 것만 일 년. 드디어 관람했다. 처음에는 그저 '고흐'이기 때문에 기다렸고, 그 이후에는 윌램 대포가 연기하는 고흐가 궁금해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을 열어본 지금, 참 많은 감정과 생각이 떠오른다. 영화를 본 후 많이 격양된 상태라 차분하게 글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감상을 적어 내려가 보려고 한다.


고흐에게로 가는 영혼의 문은 과연 활짝 열렸을까?



(* 이 글에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사실과 허구

먼저 '고흐, 영혼의 문에서'는 반 고흐의 일생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허구가 가미될 수 있는 드라마 장르의 영화임을 인지하고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더해질 수 있는 영화라 하더라도 한 인물의 전기를 담은 영화라면 모든 허구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에서 이 영화는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 든다.

과연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의 한계를 넘었을까?


먼저 이 영화는 '신화'가 아닌 '인간'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죽기 전 3년이 담긴 영화, 그가 귀를 자르게 됐던 이유 등을 홍보 타이틀에 걸어 놓고 마치 그의 일상을 엿볼 수 있을 것처럼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래서 난 평소에 그와 늘 함께했던 침잠하는 우울과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고뇌에 빠졌던 그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려내길 기대했다. 특히 영화 개봉 전부터 보이던 스틸컷과 포스터가 이 영화의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았다. 스티컷에서 보이는 색감이나 자연이 마치 고흐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열어본 영화는 실망이 가득했다.


기대와 달리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 고흐를 신격화하고 있다. 차분하게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는 고흐의 모습은 없었고, 자연을 경배하는 깊은 내면을 가진 고흐의 모습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기괴한 말이나 내뱉는 고흐를 2시간 동안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특별한 재능 때문에 그는 그림을 계속 그리려 한다. 마치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을 선물로 주기 위해 세상에 내려보낸 천사인 것처럼 그는 계속 그렇게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정작 고흐는 천재성을 타고나긴 했지만 그것을 믿고 그림을 그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타고난 천재성을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타고난 능력을 믿기보단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분석하고 연구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명 '노력파'에 가까웠다.(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가 천재가 아니란 것은 아니다.) 극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반 고흐는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괴로워하고, 자신이 한 행동을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점점 광기에 휩싸인다. 이런 극의 흐름은 과정이 없으니 납득될 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런 불안이 어떤 것으로 인해 생기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었다. 너무 유명한 그의 일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모든 과정을 생략하는 방법은 관객에게 너무 불친절했다.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나 그 태도로 인해 불안으로 치닫는 과정을 이해하기엔 설명이 턱 없이 부족했다. 과연 그는 욕망으로 그림을 그리는 천재 화가일 뿐이었을까? 정신 질환에도 불구하고 붓 터치만 하면 경이로운 결과물 만들어내는 신적인 존재였을까? 아니다. 고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인간' 고흐는 없었다.


아를 과수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고흐


고흐와 귀

고흐는 고갱과의 싸움에서 귀를 자른다. 고갱과 노란 집에서 말다툼을 한 고흐는 귀를 자르고 그 귀를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에게 전달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도 역시 많은 추측이 존재한다. 내가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이 바로 반 고흐가 귀를 자른 이 부분이다. 고갱과 고흐는 고갱이 노란집을 떠날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말다툼을 시작한다. 고갱은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가고 싶어 했고, 고갱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던 고흐에게 이런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 이야기로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되고 고흐는 절망한다.


귀가 잘린 고흐의 자화상과 그 그림이 모티브가 된 영화의 장면.


이후 화면이 전환되고 귀를 잘라 붕대를 하고 있는 고흐가 나타난다. 고흐는 그 모습으로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고흐가 아닌 의사가 담담하게 짚어 내려간다. 이 사건을 대하는 감독의 마음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감독은 고갱과 고흐의 싸움과 귀를 잘라내는 장면은 모두 삭제하고 정확하게 일어난 사실만 짚어냈다. 스스로 귀를 잘라내는 광기 어린 고흐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독의 배려가 담겨있는 구성이다.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노골적으로 장면을 삽입한 구차한 연출력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 사건에 대한 해석과 선택은 관객의 몫으로 열어주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도려내는 행동을 했음에도 정신과 의사와 대화하는 고흐는 담담하다. 심지어 그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하는 고흐의 표정은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상 고흐의 정신 질환은 이 지점에서 가장 최악으로 치닫는다.


19세기 고흐에게...

'시대를 잘 못 태어난 화가' 과연 이 수식어가 반 고흐에게 적합한 것일까? 그의 그림이 인정받고 있는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이고 또 아무도 답을 내릴 수 없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흐의 그림은 그 시대에 태어났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고흐가 좋아했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을 모작하며 얻은 영감, 살아 숨 쉬던 자연, 고전 문학 작품이 고흐의 그림을 만들었다. 고흐가 잘 못 된 시대에 태어났다? 스스로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그림이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길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치 이 영화의 고흐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내 그림을 이해 못하는 거야',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내 그림을 이해할 수 있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흐는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고 예측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미래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신이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절 화가로 만든 것 같아요.' 이 영화 속 대사들을 정말 고흐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고흐의 입에서 나온 이 터무니없는 말이 영화의 전체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치 영화 속의 고흐는 자신의 상황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말하고 행동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실제 고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고흐와 신부와의 대화


고흐의 죽음

고흐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한 인간으로서도, 화가로서도 짧은 삶이다. 죽음은 그렇게 모든 것을 끝내는 것 같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삶이 마무리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흐의 죽음은 자살과 타살 두 가지 설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권총 자살과 평소 고흐를 자주 괴롭혔던 소년이 쏜 총에 복부를 맞았다는 타살로 나뉘는데 이 영화의 결말은 후자를 말하고 있다. 2017년 개봉했던 <러빙 빈센트>와 같은 결말이다. 하지만 천천히 그 과정을 그려냈던 <러빙 빈센트>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결말로 향해가는 그 과정이 또한 너무 부실하다. 고흐의 심리와 고흐가 처한 상황은 결국 그가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의 해석이 잘 못 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반전을 노린 것인지, 그는 타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간에게 한 톨의 연민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고흐는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쐈던 소년을 감싸면서 생을 마감한다. 이 얼마나 개연성이 없는 결말인가. 이 영화에서 보였던 혼란스러운 고흐의 정신세계와 딱 부합하는 결말이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영화는 해석의 결과물이다. 이 영화 또한 감독이 해석한 고흐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에 존재하는 새로운 고흐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렇게 좋지 않은 평가를 늘어놓기 위해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고흐에 대한 영화와 책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글을 너무 심한 비판으로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물론 비난할 점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 화면의 색감이나 장면과 어우러지는 음악, 또 고흐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윌렘 대포의 연기는 극찬해 마땅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고흐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나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트린 영화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본다면 감상이 달라질까? 계속 반복해서 본다면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제 남겨진 숙제는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느끼지 못했던 고흐의 숨결을 찾는 것이다. 자만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숨결을 찾아봐야겠다.


I feel God is nature and nature is beauty.
나는 하나님은 자연이고 자연은 아름다움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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