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란 늘 우연처럼 찾아온다. 그날 역시 그랬다. '순결을 담은 고독의 세상' 글을 막 마치고 다음 주제를 고민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평소에 대화를 많이 나누는) 파리에 살고 있는 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 그 주제는 유럽에 있는 유명 향수 브랜드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여러 브랜드를 나열하며 향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다음 글 주제로 향기는 어때?'. 유레카!였다.
나는 남들보다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향에 무척 민감하다. 아주 적은 양의 향도 잘 맡고, 향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고, 아주 멀리서 나는 향도 누구보다 잘 잡아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향수를 잘 알고 또 다양한 종류의 향수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향수에 대해서는 젬병이다. 향수에 관심이 없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에겐 소량을 뿌린 향수도 그 향이 너무 강하고, 인위적인 향을 너무 오래 맡고 있어야 하는 것도 곤욕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최근에 향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즘 글을 쓸 때 항상 내 곁을 지키는 것이 있다. 바로 '향초'이다. 처음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기분을 전환할 용도로 향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향초가 없으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정도로 향은 나에게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향의 종류에 따라서 내 감정이 수시로 변하기도 한다. 향이 곧 나의 감성이 된 것이다. 요즘에는 글을 쓸 때 주제에 어울리는 향초를 선택해서 피우는데, 그 향이 나의 감각을 더 깊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깊어진 감성은 고스란히 글에 담긴다. 그래서 내 글에는 향기가 함께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글에 담긴 향을 느낄 수 있을까?
요즘 향을 사용해서 마케팅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얼마 전 관람했던 사진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장의 한 구역에 디퓨져를 배치했는데, 그 향기와 사진들이 꽤 잘 어울려 디퓨져를 구매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결국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꽤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했고 특히 그 향을 고른 사람의 안목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향기 덕분에 전시를 조금 더 예민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사람의 오감 중에 오직 시각 하나에만 의존하는 사진전에서, 또 다른 오감인 후각을 자극하는 방법은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단 어려운 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갖는 향기로 모두를 만족시키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시회에서 모두가 만족할만한 후각을 자극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렇게 인위적인 장치 없이 그 작품에서 나는 향을 직접 느끼는 방법이다. 작가라면 누구든지 분명 의도적으로 작품에 향기를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숙제는 우리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작품을 조금 더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시각과 함께 후각까지 자극할 수 있는 방법. 오늘은 그림의 향기를 맡아봐야겠다.
1882년 8월, 헤이그에서 지내고 있던 고흐는 가을 숲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네덜란드의 8월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고, 한달에 열흘이상 비가 온다.) 그는 숲에서 다양한 연구를 했는데 어리숙한 초보 화가였던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한다. 숲에서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그는 그곳에서 갑자기 비를 만났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지만, 그곳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비가 멈추길 기다렸다. 마침내 비가 그쳤을 때 땅이 놀랍도록 깊은 색조를 띠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비가 오기 전에 무릎 정도 되는 높이에 시야를 두고 작업하고 있었던 그는 비가 온 뒤에도 같은 구도를 위해 진흙탕에 앉아 계속 작업을 이어나간다. 그때의 상황을 회상하며 테오에게 '이런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쉽게 망가지지 않는 작업복을 입는 것이 나에게 더 실용적인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숲에서 나온 또 다른 연구는 죽은 나뭇잎이 있는 땅에 '커다란 녹색 너도밤나무 몸통'과 '흰옷을 입은 소녀의 작은 형상'에 관한 것이다. 거기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것을 선명하게 유지한 상태로,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나무 몸통과 원근법에 의해 변형된 나무 몸통의 두께 사이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안에서 숨을 쉬고 돌아다니면서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82년 8월 2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고흐가 그렸던 헤이그의 숲 그림 중 한 작품이다. 억수 같이 비가 내렸던 그날의 그림은 아니지만 많이 떨어진 나뭇잎과 땅의 어두운 색으로 보아 비가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그림의 페인트에서 발견된 참나무 잎이다. 참나무 잎을 연구해본 결과 숲 바닥에서 나온 참나무 조각이 페인트에 박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 숲의 향을 추측해볼 수 있다. 너도밤나무의 향과 참나무의 향, 그리고 나무들에서 떨어진 죽은 나뭇잎과 비를 머금은 땅의 향기.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을 담은 시원한 숲의 향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 생각에 농부 그림에서 어떤 지극히 일반적인 평온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농부 그림에서 베이컨, 연기, 찐 감자의 좋은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마구간에서 비료 냄새가 매우 심하게 난다면, 그것이 바로 마구간의 모습이다. 들판이 밀이나 감자들의 냄새 또는 구아노(바닷새의 배설물)와 비료의 고약한 악취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다. 특히 도시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이런 그림에서 유용한 것을 얻는다. 그러나 농부 그림이 향수가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네가 이것에서 어떤 것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네가 무엇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1885년 4월 3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고흐의 유명한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의 대표 작품이다 보니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양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기술적인 설명보다 그림 속의 '향'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그는 이 시기에 인물들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디테일한 얼굴의 표정부터 그들의 몸짓이나 행동까지 다양한 구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구를 통해 탄생한 대작,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 그는 테오에게 이러한 편지를 남겼다. 그는 그림을 볼 때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느낄 향기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향이 담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사람들이 작품을 통해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농부의 삶을 잘 이해하는 화가였다.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한 결과인데 일상부터 일하는 모습까지, 그들의 삶이 만들어낸 결과를 오감으로 느꼈고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다. 그는 농민들의 모습을 평범한 방식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거칠고 투박한 모습 그대로를 그림에 담았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는 케케묵은 집의 냄새가 흘러나온다. 어디 한 곳 깔끔한 곳이 없는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날 것 같은 갓 찐 감자와 차를 먹는다. 그곳의 냄새는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매캐한 향과 합쳐지면 더 고약한 냄새가 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향은 지극히 평범한 농민들의 것이었다. 어쩌면 고흐에게도 났을지 모르는 그 향. 이 그림에서는 유난히 고흐의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고흐는 1889년 5월부터 생 레미 요양원에 머물렀다. 그는 기분이 괜찮을 때는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요양원의 허락을 받고 그 지역 올리브 밭을 자주 찾아갔다. 1889년 11월 한 달은 계속 올리브 밭을 그렸다. 그가 한 달 동안 올리브 밭의 그림을 그릴 때 올리브 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또 있었다. 바로 고흐의 친구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이다. 그들은 동명의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아래의 두 작품,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이다.
고흐는 이 두 작품을 보고 동생 테오에게 '그들이 그리는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는 나를 화가 나게 만들었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성경을 작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그림에는 실제로 관찰된 것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견을 친구인 '베르나르'에게도 말하며 실제로 보이는 자연을 조금 더 깊게 연구해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더한다.
올리브 나무는 북쪽에 있는 우리의 버드나무나 가지를 짧게 쳐낸 수목처럼 변하기 쉽다. 버드나무가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록 그것이 단조롭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 나라(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나무이다. 우리 고향에 버드나무가 있듯이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이곳에서 정확히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한 일은 그들(고갱과 베르나르)의 관념에 비해 다소 냉혹하고 거친 사실주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주고, 흙냄새를 풍길 것이다.
1889년 11월 26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 편지를 쓸 무렵 고흐는 30호 캔버스에 올리브 나무 다섯 점을 그렸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중에 '고갱'과 '베르나르'의 그림과 같이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을 한 점 소개하려고 한다. 그림은 황금빛 태양 아래 아름답게 펼쳐있는 올리브나무에 대한 고흐의 시각이다.
성경을 주제로 삼았던 '고갱'과 '베르나르'의 그림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같은 시기에 그려졌던 다섯 점의 올리브 나무 중에 이 그림을 선택했던 이유는 자연과 인물을 활용하는 방법을 비교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 점의 작품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올리브 나무 아래 서있다. 하지만 고갱과 베르나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다. 그들의 생각 혹은 고단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고, 그들의 배경으로 보이는 나무에서조차 어떠한 향기도 느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이곳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은 사실적이다. 그것이 비록 거칠게 표현됐더라도...
그는 오랫동안 관찰했던 올리브 밭의 모습을 그림에 모두 넣으려고 노력했다. 나머지 네 점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더욱 자세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변화, 날씨의 변화와 땅의 변화까지 모두 현실감있게 표현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모습에서 우리는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데, 살짝 미소를 지은 인물에게서는 푸근함까지 느껴진다. 이제 막 딴 저 올리브는 얼마나 신선할까. 그 향긋함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태양의 빛을 담긴 그림이어서 그럴까? 유난히 이 그림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신선한 올리브의 향과 날씨가 좋은 날의 향긋함. 비로소 이 그림으로 안정을 얻는다.
단순한 계기는 이렇듯 곧 결과가 된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 '고흐의 향'을 찾는 연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직접 관찰한 것을 모두 그림에 넣으려고 했던 그의 자세를 본받고 싶지만, '실제로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지금까지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있던 것일까?' 깊게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또, 고흐의 그림을 글로써 체감할 수 있도록 쓰고 있는 이 글이 과연 사람들의 숨어있는 감각을 깨울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의 그림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도 들었다. 하지만 처음 글을 시작했던 그 마음가짐(누군가에게 이를 통해 고흐를 나와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오늘은 어떤 글보다 그가 남긴 향의 여운을 느끼길 바란다.
참고로 오늘 나의 향은 'Summer wish'이다.
'여름의 소망'과 함께 깊어지는 밤이다.
* 1889년 11월, 고흐가 연구했던 30호 캔버스의 다섯 점 중 나머지 네 작품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