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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outjina Mar 05. 2019

사랑스러운 빈센트,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나

2018.02.13~2018.02.18 네덜란드 여행기


이 글은 나에게,
그리고 이랑언니와 가혜에게 바치는 글이다.
생일 축하해, 여러분.




유로 오랜만

혼자 출국, 혼자 여행. 모두 익숙지 않은 것 투성이었다. 설렘은 없고 불안만 남은 나의 심경이 '이번 여행을 잘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런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의 여행 메이트가 손수 공항까지 에스코트. 이날의 이 에스코트가 없었다면 난 공항으로 출발조차 못했지도 몰라요. "그래! 일단 가보자!"


언니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던 출국.



1일차 : 적당한 긴장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유럽이었다. 유럽은 오랜만이었다. 3년 만인가? 다른 거대한 공항과는 달리 작고 소박한 스키폴 공항은 초초한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곳은 마치 작은 암스테르담 같았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질서 정연한 모습. 이 자리에 앉아 나오는 짐을 찾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착 문자를 보내고 나니 정말 유럽에 혼자 있는 것이 실감 났다. '아 그래... 나는 혼자구나.'


트렘을 타고 호텔로 넘어가는 중.


마침내 안전하게 호텔 도착. 6일 동안 잘 부탁해.


처음은 늘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운 첫 도전에는 매번 망설임이 존재한다. 도착이 늦은 시간은 아니었기에 저녁식사를 일정에 넣어놨지만, 첫 도전의 망설임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해가 일찍 지는 겨울의 유럽. 오후 8시라는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둡고 조용한 동네에 급 주눅이 들어버렸다. 과도한 업무와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자 오늘은 외출이 아닌 휴식을 선택했다. ‘그래... 천천히 하자. 그게 이번 여행 테마니깐.’



2일차 : 유러피안 스타일로


네덜란드로 출발하기 전 며칠을 고생했던 불면증이 이곳까지 따라왔다. 첫 날부터 깊게 잠들지 못했고 새벽에 떠진 눈은 그 뒤로 감길 줄 몰랐다. 첫날부터 수면 부족이라니... 아침부터 몽롱. 그래 그럼 차라리 씻고 일찍 나가자. 씻고 나오니 창문 밖으로 일출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해가 뜨는 걸 봤던 것이 언제였는지. 이날을 시작으로 매일 마주했던 일출. 그리고 여행 중 가장 평온했던 시간. 이제 사람들이 일출을 보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호텔에서 보이는 일출.


1. 오늘의 룩 / 오늘의 조식


이번 여행 테마는 ‘느리게 또 천천히’이다. 유러피안처럼 서두르지 않는 것. 재촉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느린 시간을 음미하는 것. 하지만 30년을 급하게 살아온 내가 하루아침에 이것이 될 리 만무했다. 반 고흐 뮤지엄 9시 오픈 시간을 맞춰 가기 위해 10분 거리인 이곳을 장장 한 시간을 잡고 미리 나왔다. 추운 길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던 것이 지금도 피부에 느껴지지만 그랬기에 여유롭게 걷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거리였다.


조용한 암스테르담의 아침.


오후가 되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포토존. 하지만 나는 조용한 이곳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빈센트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나


사실 이번 여행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작년, 우연히 갔던 잠실의 반 고흐 카페.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반 고흐 앓이가 날 이곳까지 안내했다. 반 고흐를 진하게 느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뇌가, 그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왜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갔는지. 왜 스스로 고독을 선택했는지. 지금의 나는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그의 작품을 만나야 했고 그렇게 떠나게 된 네덜란드.

마침내 이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안녕. 반 고흐. 내가 이곳에 왔어.


날씨가 너무 좋은 첫 날.


유일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내부. 중간 중간 작품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나는 그냥 눈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그래서 난 작품이 아닌 공간을 남기고 싶었다. 그들의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사람들이 보던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반 고흐 뮤지엄에서 사랑 받는 작품이다.
까마귀 나는 밀밭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밀밭

반 고흐 미술관을 나오기 직전에 마주했던 두 작품. 이 두 그림은 반 고흐 미술관 가장 위층에 나란히 걸려있다. 비슷한 시기, 같은 사이즈 캔버스에 그린 이 두 그림은 다른 듯 보이지만 많이 닮아있다. 1890년 7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이곳에 돌아와 다시 그림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붓을 손에 쥘 힘조차 없더구나. 하지만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세 점의 큰 그림을 그렸단다. 그중 하나가 혼란스러운 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밀밭 그림이다. 극한의 외로움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내 길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겠지... 너도 곧 이 그림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가능한 빨리 이 그림을 너에게 가져갔으면 한다. 이 그림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 감정을 네게 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흐의 감정이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난 이 작품들에서 고흐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 편지의 ‘혼란스러운 하늘 아래 펼쳐진 밀밭’은 일반적으로 <까마귀 나는 밀밭>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난 이 두 그림을 보고 ‘혼란스러운 하늘 아래 펼쳐진 밀밭’은 어쩌면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밀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실은 고흐만이 아는 법. 하지만 꼭 진실을 알 필요는 없겠지. 사실이야 어찌 됐던 해석은 내가 하는 거니깐.

‘반가웠어. 아저씨.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닌걸. 난 이제 시작이야.’



이로써 나의 첫 번째의 날, 첫 번째 스케줄이자 마지막 스케줄이 끝났다. 오늘의 다른 일정은 그냥 암스테르담 거닐기. 이제 한 번 거닐어볼까.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담 광장.


암스테르담의 이곳 저곳.


그리고 배고플 찰나에 도착한 이곳. 작지만 깔끔했던 장소.


맛에 친절은 덤. 이거 한 번 더 먹고 싶었는데...


반 고흐에게 예쁘게 보인다고 꾸미고 나온 덕분에 유럽의 강추위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코는 계속 훌쩍 훌쩍. 몸은 으슬으슬. 약간의 미열이 감지될 때쯤 다시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완전 무장. 다시 나가보자.


따뜻한 몸으로 다시 이곳 저곳.


내가 좋아하는 서점.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서점이었다. 이 날 책은 사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갔을 때는 주말이라 문을 닫아서 가보지 못했다. 아쉬워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계속 걷나보니 다시 담광장.


따뜻한 옷 덕분에 겨울의 추위를 잠시 망각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담 광장에 앉아 멍하니 사람 구경을 했다. 옆에 앉아 열심히 사진을 찍던, 대뜸 나에게 폴란드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봤던 사람. 단체로 놀러 왔던 사람들. 분장을 하고 사람들과 사진을 찍던 사람. 열심히 비눗방울을 만들어 주는 사람. 비둘기에게 열심히 빵을 뜯어주던 사람. 여행을 온 가족과 커플들, 친구들. 그 사이를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흔적을 만들고 있는 그 자리에 '잠시'라는 시간 동안 머물며 그들의 존재를 느껴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또한 내가 스치는 것이 아닌 잠시 머문 사람으로 존재하길 바라면서 그곳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춥다'라고 느끼기까지 앉아있었던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순간'처럼 지나간 '한참'의 시간이었다.


해가 진 암스테르담은 더 아름답다.
저녁으로 먹으러 갔던 애플파이. 이날 난 처음으로 내가 파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왜 갑자기 네덜란드에 와서 알게 되었을까.



3일차 :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암스테르담


2. 오늘의 룩 / 오늘의 조식


암스테르담 기상청의 정보는 정확했다. 전날의 비 예보가 빗나가길 기대했지만 새벽부터 유리창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암스테르담의 2월은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온 터였다. 우중충하면 어떠리. 오늘도 고흐의 영혼을 만나보러 가보자.


300년 전으로 시간 여행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실내 촬영이 가능한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몇 작품 담아 왔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내 도서관. 너무 멋있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이곳에서 책을 읽고 싶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좋아하던 할아버지.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는 고흐가 특히 감명을 받은 작품이다. 오랜 시간 이곳에 서서 그림을 응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서 있었던 그곳에, 지금 내가 있다. 그리고 이 순간, 사진 속 할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렘브란트의 작품 앞에서 한없이 그림을 바라보던 할아버지.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꼼꼼히 그림을 응시하다 마지막에는 휴대폰과, 태블릿 PC로 사진까지 열심히 담아가던 할아버지. 3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렘브란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 할아버지에게... 그리고 렘브란트가 영감을 주었던 고흐가 지금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처럼. 이 미술관에서 보았던 이 할아버지처럼 늙고 싶어졌다. 나이에 상관없이 예술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으면서,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졌다.


오늘의 그림
암스테르담 고냥이. 아 비온다...
첫 날 오려다 못 왔던 Lotje. 분위기가 너무 이쁘다.
맛은 글쎄... 나는 그냥 쏘쏘.


분위기가 이뻤던 CT coffee&coconuts. 사람이 정말 많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그림을 그리며 휴식.


사실 네덜란드를 방문하기 전, 날씨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2월의 유럽은 이미 날씨가 안 좋기로 유명했고, 특히 네덜란드는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갔기 때문에 새삼, 비에 실망하진 않았다. 하지만 늘 여행 운이 좋은 나는 이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맑은 날씨의 네덜란드 속에서 여행을 즐기다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여행 중 이날의 날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뭔가 정말 유럽의 날씨를 만나고 온 느낌이랄까? 우울한 한 것을 워낙 즐기는 나이기에 이날의 이 비조차 너무 매력 있게 다가왔다. 여행 중에 하루 정도 비가 더 왔어도 좋았을 뻔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마켓 Albert Cuyp Market. 구매는 패스. 그냥 구경만 했다.


Sarah가 추천해준 감튀. 이거 진짜 맛있었는데ㅠㅠ


암스테르담을 이곳저곳 참 많이도 걸어 다녔다. 모두가 춥다고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왜 암스테르담이 따뜻할 것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추운 날씨에 걸어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손까지 모두 얼어버려 더 이상 사진을 찍은 것도 불가능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거리, 눈에 보이는 골목들을 걸어 다니다 보니깐 예상 밖의 아름다운 곳도, 예상 밖의 별로인 곳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충격적인 홍등가의 방문까지... 외국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잘도 다니던데. 나의 성적 개방 수준이 아직 그 아이들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나 보다. 내일부터는 암스테르담이 아닌 다른 곳을 다녀야 하니깐 오늘은 이곳을 더 즐겨야지.


어느새 밤이 됐다. 아 이뻐. 크리스마스 같애.


벌써 삼일 차이다. 하지만 아직 삼일 차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이미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서울에서도 푹 쉬다 오지 못한 데다 암스테르담에서의 두 밤 모두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불면증을 이곳에서 없애보자 하는 다짐으로 오늘은 하몽과 멜론, 그리고 와인을 사 왔다. 미국에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그래 이거면 불면증을 이길 수 있어! 오늘은 숙면을 취해보자.


혼자 분위기 잡기


그리고 이날 푹 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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