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을 하면 양 손은 무거워지고, 수면 시간은 줄어들고, 돈은 더 많이 쓴다.
매일매일 눈 뜨며 잠들기 직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는 생각. 이것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자 나라는 인간을 살게 하는 필수 요소. 공기, 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다.
혹시 몰라서 20분 일찍 일어나고 혹시 모르니까 10분 일찍 나가고 혹시 모르니까 한 개를 더 산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저것도 가방에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외출을 준비하며 일기예보 확인은 필수다. 강수확률이 50퍼센트라면 우산을 챙겨 밖을 나선다.
확률은 반반. 어느 날에는 혹시 몰라 챙겼던 손수건, 위장약, 여분의 옷가지 따위를 유용하게 쓴다. 또 어떤 날에는 프린트 해온 종이를 찢어서 버리고, 여분으로 산 무언가를 뜯어볼 일도 없다. 혹시 몰라서 하는 행동의 반은 맞고 반은 헛수고다.
손이 무거워지고 길을 돌아가고 돈을 더 써도 이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혹시 모를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무조건 나았으니까.
마음이 피곤한 것보다는 몸이 피곤한 쪽을 선택하는 나는 지독한 변수포비아다.
변수
1. 어떤 상황의 가변적 요인
2. 어떤 관계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값으로 변할 수 있는 수
포비아(phobia)
1. 공포증
2. (명사에서) 혐오증
'내일 A라는 일정이 있으니 AA를 준비한다'가 뼈대가 되는 생각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예를 들자면 내일 사무실 레이아웃 공사가 있어 책상도 파티션도 개인 짐도 다 옮길 예정이니 출근길 편의점에서 물티슈를 살 예정이다가 되겠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다. (설마 아닌가) 심지어 나는 사무실에 이미 물티슈가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지금 가진 것으로는 모자랄 게 분명했다. 물건에 쌓인 먼지, 새 책상이랑 PC 등 닦을 게 엄청나므로 물티슈가 많이 필요할 거고 그러니까 미리 사야 하는 건 내게는 당연한 일이다.
뼈대가 된 생각에는 살이 붙는다.
내 책상만 닦게 되는 게 아니라 주변 동료들에게도 자연스레 나눠주게 되므로 2개를 사야 하나? 집에 대량으로 구매해둔 물티슈 더미를 보며 이것을 들고 출근할 것인가 회사 앞 편의점에서 구매할 것인가로 생각이 번진다.
나의 출근길 혼잡도는 숨도 못 쉬게 빽빽한 지옥철이다. 여기에 무언가를 손에 들고 출근하는 것은 피로도 X50 증가시키는 일이니까 회사 앞에서 구매한다로 결정을 내린다.
지금 나열한 예시는 '난이도 하'에 속하는 일반적인 (숨 쉬듯이 하는) 생각이다. 굳이 수치화하자면 양치하면서 3분이면 끝나는 간단한 생각이랄까.
3박 이상 여행 짐을 쌀 때는 3일 이상 필요하고 혹시 몰라 찍어두고 캡처해둔 사진들이 갤러리와 클라우드에 빼곡하다. 신혼집을 결정하고서는 현관부터 방마다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두었다. 그 영상 덕분에 보일러 위치가 어디 있었지? 샤워기 모양이 뭐였지? 입주 전 동영상을 멈추어보며 유용하게 확인했다.
잠들기 전 매일 반복하는 행동도 있다. 나는 휴대폰 알람 3개와 아날로그 알람시계 1개를 맞추고 자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직전 알람 시곗바늘을 돌려 알람 소리를 귀로 확인한다. 벨소리 크기도 최대화해서 들어보고 잔다. 이 사실을 남편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찌나 웃던지. 매일 밤 서로를 신기해하며 잠이 든다.
과거에는 이런 성향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했다. 남들과 다른 인간으로 분류되는 것 같아서. 별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하지만 별나다는 건 특별하다는 것과도 같지. 지금의 나는 별 모양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준비하는 게 뭐 좀 어때서.
준비를 안 하고도 괜찮은 사람이 있듯이 나는 준비를 해야만 괜찮은 사람이니까.
이걸 받아들이니까 한 번쯤은 '될 대로 돼라'는 나답지 않은 말도 내뱉는다.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그러니까 소개하자면 내 좌우명은 유비무환이고 특기는 준비하기다. 이 정도면 진짜 특기 아닐까. 어디까지 준비해봤니 대회 있으면 출전하고 싶다.
자주 우산을 챙기고 매일 알람을 들어보는 사람.
나는 나를 계속해서 배우고 보살피고 들여다볼 작정이다. 왜냐고? 혹시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