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깜짝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축하를 목적으로 하거나 위로나 응원이기도 하다. 목적이 어떻든 내가 즐기는 서프라이즈는 받는 이를 기분좋게(중요) 놀라게 하는 게 포인트다.
이 에피소드의 가장 먼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주무셨던 날, 아홉 살인가 열 살 무렵 기억이다.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난 나는 살금살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아침을 차려 엄마와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 국을 데우고 엄마와 할머니가 깰까 조심조심 그릇을 꺼내 밥을 담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열어 예쁘게 담았다. 잠시 후 주방으로 나온 엄마와 할머니는 한바탕 뒤집어졌었다. 엄마는 "이걸 딸이 차렸어? 나는 잠결에 엄마(할머니)가 뭐 하는 줄 알았지!" 이어서 할머니는 오메오메 나는 네가(엄마)가 밥 하는 줄 알았지. 세상에 우리 강아지 장하다!"
그때의 난 무슨 감정을 느꼈길래. 열 살의 꼬마는 자라는 동안 엄마가 외출한 날 이면 어김없이 설거지를 척척 해놓거나 밥을 지어놓고는 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깜짝 놀라며 이걸 딸이 다했어? 아이고 세상에! 고마워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결혼을 하고 엄마랑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은 택배를 시키고 전화를 한다. 엄마! 집으로 사과랑 양파 시켰어. 다 떨어진 거 같던데 먹고 싶었지? 이거 필요했지? 하면서 엄마를 놀래킨다. 무척 즐겁다.
최근에 두 번의 서프라이즈를 성공했다. 한 번은 재택근무 중이던 친구랑 메신저를 하다 시작됐다.
친구는 간밤에 술을 다소 먹어서 토마토주스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배달 최소 주문금액이 만 원 이상이라 혼자 3잔 이상 시키기에 망설여지는 듯 보였다. 이때다 싶어 배달앱 선물하기로 1만원권을 보냈다. 내 친구 토마토주스 사 먹어라!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받은 친구는 연신 미쳤나봐! 하며 놀랐고 크게 감동받았다며 고마워했다. 즐거웠다.
나는 그때가 [그 선물]을 할 기회인 걸 알았다. 살면서 느낀 건데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거' 누가 대신 사주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에게도 그 기회가 오면 (지갑이 허락하는 한) 천 원짜리 붕어빵이던 만 원짜리 토마토주스던 놓치지 않는 편이다. 몇 배의 감동을 주는 걸 알아서다.
또 하나는 '나 아니면 못할 것 같은 선물'이다. 11년 전 첫 번째 직장 동료였던 J언니의 생일 선물이 그랬다. J언니는 내가 본 부자 중에 가장 검소했던 사람이다. 당시 사회초년생인 나는 뭘 잘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가방, 옷, 신발들이 다 명품이었다.
나를 데려갔던 초밥집도 갈빗집도 가격이 상당했으나 전혀 티 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몰랐다. 과시하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우아했다.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티를 안 내었어도 태가 나서 그랬을까. 직감적으로 J언니에게 물질적인 선물은 별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의지를 많이 했고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고민을 거듭하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만 할 수 있는' 선물을 생각하기로 했다.
J언니가 평소 즐겨 쓰는 핸드크림인가 립밤인가를 사고 커다란 하드보드지와 색지들을 샀다. 그리고는 몇 날 며칠 시간을 들여 상반신만 한 초대형 케이크 편지지를 만들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그 선물을 만드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었다.
J언니가 이것보다 더 비싼 케이크는 많이 받아봤어도 이런 케이크는 못 받아 봤을 거야! 언니는 그 케이크를 부모님께도 보여드렸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다. 며칠 고생한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 조차도 스무 살짜리 동료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그녀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J언니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니 또 그렇네. 고마워라.
암튼, 시간이 흘러 서른한 살의 나는 또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N선배는 스물다섯 살 회사에서 만난 선배다. 최근 에세이 출간을 앞두고 있었는데 행복한 날을 맞은 선배에게 축하를 하고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나만 할 수 있는 선물은 뭘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극강의 서프라이즈를 해야겠다. 일단 익명의 선물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책 표지에 들어간 사진을 활용해 컵을 주문 제작했다. 컵 제작 작가님과 한 달간 연락을 주고받으며 출간일에 맞춰 배송될 거란 확신을 얻었다.
드디어 디데이.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일하면서 송장번호를 몇 번이나 조회했는지. 택배 도착 예정시간은 20시에서 21시였다. 남은 배송 지점은 100여 곳. 틈틈이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남은 배송지가 119곳에서 103곳 97곳으로 줄어드는 게 보였다. 오예!
퇴근 후 택배 상자를 문 앞에서 만나길 바랐는데 염원이 닿았는지 오후 4시 반인가 5시쯤 송장번호를 입력하자 배송 완료라는 텍스트가 보였다. 앗 그런데 재택근무기간 일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중요한 날이니 연차를 쓰셨을까.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다. 그래도 연락할 수 없지! 나는 서프라이즈 중이니까! 하하핫!
나는 궁금했다. 선배가 나를 몇 번째로 떠올릴까. 선물과 함께 한 장의 카드를 동봉했기에.
그곳에 -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녀석으로부터 - 라고 적었다. 우리가 대화를 하며 즐겨 쓰는 문장도 아니고 선배가 나를 녀석이라 부르지도 않으니 받자마자 나를 떠올리기는 어려운 힌트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첫 번째는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돌고 돌아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겠지. 아 그래도 바로 맞추면 어쩌지? 혼자 키득대며 퇴근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밤 12시를 넘어가자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엇 이쯤에는 연락이 와야 하는데? 혹시 택배 분실된 거 아니야? 익명의 택배를 보내본 일이 처음이라 걱정이 커져만 갔다.
으아악 택배가 집 안에만 있기를. 아주 바쁜 날이라 선배가 택배를 못 열어본 거라면 괜찮은데 혹시 내가 주소를 잘 못 적은 건 아니겠지. 층을 잘 못 적었나? 전화번호를 잘 못 적었나? 배송사고만 아니면 좋겠다. 걱정이 걱정을 불러 누가 택배를 훔쳐가는 상상까지 닿자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맙소사! 정신차려!
다행히 남편이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크게 웃으며 지금 연락하면 한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한 게 의미가 없지 않냐며 고삐를 꽉 붙잡아준 덕분에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휴 이런 사람과 결혼을 해서 참 다행이네.
이윽고 다음날 아점을 먹으려는데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후기를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완벽한 타이밍에 선물이 손에 닿았고 생각보다 더 큰 감동을 선물한 듯했다.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다만 선배는 누군지 생각하는 것 이전에 가만히 감동을 즐기고 싶었다고 했다. 맞아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산통 깰 뻔. 다시금 남편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이렇게 두 건의 크고 작은 서프라이즈 선물 에피소드는 막을 내린다.
이 글을 쓰며
자연스레
왜 이런 서프라이즈 선물을 즐기는
인간이 되었을까 생각했고
답을 찾았다.
J언니한테도
N선배한테도
친구K한테도
엄마한테도 할머니한테도
값비싼 선물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액수를 더 하는 게 아닌
아이디어를 더 하려다 보니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도.
그때의 나는
아끼는 사람의 생일이, 기념일이, 축하할 날이
오는 게 사실 조금은 걱정거리였다.
월급날까지 한참 남았는데
5만원이 달랑달랑한데
나는 또 당신을 기쁘게는 하고 싶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고
웃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겉이 아닌 속까지 닿을 수 있는
선물을 생각해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내가 살아온 생존 방식
비싼 선물이 아닌
놀라운 선물을 하며
마음을 전하려는 노력.
그때의 나는
만원 짜리 한 장의 쓰임과 우선순위가
너무 중요했으니까.
지금의 나는
아끼는 후배의 이삿날
좋아하는 그림도 사줄 수 있고
결혼하는 동기에게
축하한다며 와인 한 병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만의 서프라이즈는
매우 즐겁고 의미있다.
N선배가 그랬다
이런 지구력과 집요함으로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명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고.
이제 나는
조금은 나를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