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탄만두 Dec 13. 2021

겉과 속을 돌보았네

11월 4주차 엄지 리포트


11월 20일 토요일

와인 두병과 자동으로 묶어주는 마법의 쓰레기통을 들고 친구 신혼집에 다녀왔다. S는 나의 부케를 받아준 친구로서 나의 결혼동기가 되었다. 한 때 우리는 카페에서 한숨을 즐겨 마시며 '결혼할 수 있을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고는 했었다. S네서 그때의 기억 조각을 꺼내 깔깔대며 웃었다. 둘 다 쿵짝이 잘 맞는 짝을 만났다는 생각과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들로 순간순간 무척 행복하고 즐거웠다.

# 엄지 + 1


11월 21일 일요일

토요일의 즐거운 파티로 숙취가 심했다. 컨디션이 별로였지만 돌아오는 금요일에 셀프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예정이어서 노트북을 열어 귀걸이를 주문했다. 그 와중에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에 진심임이 분명하다.

# 엄지 + 0.5


11월 22일 월요일

난 정말 만원 지하철이 싫다. 누군들 좋아할까 싶지만 진짜 진짜 내가 1등으로 싫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날은 역대급이었다. 지하철까지 데려다주는 꼬마 마을버스 3대를 보내고 (꽉 찬 채) 4번째 마을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버스 모양대로 고개를 꺾은 채 삐딱하게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역에 도착하자 팝콘처럼 모두가 튕겨져 나왔다. 그러나 마을버스는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지하철이 실전이다. 얼굴을 제외하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꽉꽉 들어찬 작은 지옥에서 가드를 단단히 올린 채 중심을 잡는다.


할 수 있는 건 겨우 눈을 끔뻑거리는 정도다. 매일 아침 겪는 고문이다. 숨 쉬는 것도 헛기침 한 번도 앞뒤옆옆 사람에게 파동이 된다.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여기에 짐이라도 있다면 악몽이 시작된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계속계속 많지? 아니 도대체 서울 인구밀도 어떻게 된 거지? 다음 환승을 위해 휩쓸리듯 열차에서 내려진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긴긴 줄 끝에 환승을 마치고 또 다른 열차 앞에 줄을 선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진이 쏙 빠진다. 정말 월요일 출근길 별로다.

# 엄지 - 2


11월 23일 화요일

퇴근 후 옆동네 여의사 선생님이 계시는 산부인과 진료를 보러 갔다. 선생님은 친절하셨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그 의자는 여전히 별로였다. 자궁경부암 국가검진 대상자로써 의무를 다했고 난소와 자궁 컨디션을 확인해봤다. 퇴근 후 피곤한 와중에 뭔가 건강 챙기는 사람이 된 듯하여 뿌듯함 만끽.

# 엄지 + 1  


11월 24일 수요일

누군가 어떤 잘못을 확실하게 했을 때, 백프로 뼈 때릴 수 없는 관계라면 오십프로 이상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해주는 게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날. 돌직구보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게 에너지를 더 쓰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 엄지 - 1


11월 25일 목요일

오전 반차였던 날, 병원에 갔다가 회사 복귀 전 오랜만에 혼밥을 했다. 예전에는 진짜 혼밥을 못했는데 이제 분식이나 패스트푸드점 정도는 해볼 만하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고독한 미식가처럼 김밥이랑 우동을 먹었다. 과거에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사실 이날 오전 반차도 예전 같았으면 회사 눈치 보고 못 쓰는 거였는데. 회사 일정이고 뭐고 내 몸을 먼저 챙긴 게 거의 처음이었다. 오후에 복귀해보니 회사는 역시 아무 일도 안 생겼다.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기고 잘 보살펴 주기로 다짐했다.

# 엄지 + 3


11월 26일 금요일

퇴근 후 후배 B와 셀프 사진관 갔다가 저녁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두피에 땀나는 일 없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어서 흡족한 마음으로 퇴근. 결혼 후 체중이 증가해 사진관에서 직면한 현실 모습에 꽤나 당황함. 어찌어찌 결과물은 잘 나왔지만 속으로 다이어트 의지 불태움. 밥을 먹으러 가서 3일 뒤 생일을 맞이하는 후배에게 준비한 선물과 편지를 건넸다. B가 무척 좋아해서 나도 기뻤다.


돈 쓰는 일 생길까 쫄아 살던 때 마음에 빚이 있던 사람들에게 보은 하는 일로 즐거운 요즘. 이 날도 그런 날이었다. B가 스물셋인가 둘일 때 우리는 계획이 살짝 틀어져 충동적으로 어느 근사한 루프탑 바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스물여섯인가 일곱) 각자 칵테일 두어 잔씩 먹었고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당황했고 그런 적이 있었다. 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므찌게 신용카드를 긁고서 집 가는 길 버스에서 홀로 다음 달 카드값 걱정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다음날 B가 자신의 몫을 나에게 부쳐왔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 고마운 마음만 받고 정말 그 돈은 안 받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러지 못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받고서 다짐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나서야 마음을 갚았네. 집 오는 길 너무나도 행복했다.

# 엄지 + 5





11월 4주차
엄지 리포트  + 7.5

순간순간 행복한 일이 많았고 나의 겉과 속을 스스로 돌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주간이었다. 자존감 올라가는 소리가 우리 집 현관은 확실히 넘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엄지를 모아 모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