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주차 엄지 리포트
11월 20일 토요일
와인 두병과 자동으로 묶어주는 마법의 쓰레기통을 들고 친구 신혼집에 다녀왔다. S는 나의 부케를 받아준 친구로서 나의 결혼동기가 되었다. 한 때 우리는 카페에서 한숨을 즐겨 마시며 '결혼할 수 있을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고는 했었다. S네서 그때의 기억 조각을 꺼내 깔깔대며 웃었다. 둘 다 쿵짝이 잘 맞는 짝을 만났다는 생각과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들로 순간순간 무척 행복하고 즐거웠다.
# 엄지 + 1
11월 21일 일요일
토요일의 즐거운 파티로 숙취가 심했다. 컨디션이 별로였지만 돌아오는 금요일에 셀프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예정이어서 노트북을 열어 귀걸이를 주문했다. 그 와중에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에 진심임이 분명하다.
# 엄지 + 0.5
11월 22일 월요일
난 정말 만원 지하철이 싫다. 누군들 좋아할까 싶지만 진짜 진짜 내가 1등으로 싫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날은 역대급이었다. 지하철까지 데려다주는 꼬마 마을버스 3대를 보내고 (꽉 찬 채) 4번째 마을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버스 모양대로 고개를 꺾은 채 삐딱하게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역에 도착하자 팝콘처럼 모두가 튕겨져 나왔다. 그러나 마을버스는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지하철이 실전이다. 얼굴을 제외하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꽉꽉 들어찬 작은 지옥에서 가드를 단단히 올린 채 중심을 잡는다.
할 수 있는 건 겨우 눈을 끔뻑거리는 정도다. 매일 아침 겪는 고문이다. 숨 쉬는 것도 헛기침 한 번도 앞뒤옆옆 사람에게 파동이 된다.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여기에 짐이라도 있다면 악몽이 시작된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계속계속 많지? 아니 도대체 서울 인구밀도 어떻게 된 거지? 다음 환승을 위해 휩쓸리듯 열차에서 내려진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긴긴 줄 끝에 환승을 마치고 또 다른 열차 앞에 줄을 선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진이 쏙 빠진다. 정말 월요일 출근길 별로다.
# 엄지 - 2
11월 23일 화요일
퇴근 후 옆동네 여의사 선생님이 계시는 산부인과 진료를 보러 갔다. 선생님은 친절하셨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그 의자는 여전히 별로였다. 자궁경부암 국가검진 대상자로써 의무를 다했고 난소와 자궁 컨디션을 확인해봤다. 퇴근 후 피곤한 와중에 뭔가 건강 챙기는 사람이 된 듯하여 뿌듯함 만끽.
# 엄지 + 1
11월 24일 수요일
누군가 어떤 잘못을 확실하게 했을 때, 백프로 뼈 때릴 수 없는 관계라면 오십프로 이상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해주는 게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날. 돌직구보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게 에너지를 더 쓰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 엄지 - 1
11월 25일 목요일
오전 반차였던 날, 병원에 갔다가 회사 복귀 전 오랜만에 혼밥을 했다. 예전에는 진짜 혼밥을 못했는데 이제 분식이나 패스트푸드점 정도는 해볼 만하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고독한 미식가처럼 김밥이랑 우동을 먹었다. 과거에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사실 이날 오전 반차도 예전 같았으면 회사 눈치 보고 못 쓰는 거였는데. 회사 일정이고 뭐고 내 몸을 먼저 챙긴 게 거의 처음이었다. 오후에 복귀해보니 회사는 역시 아무 일도 안 생겼다.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기고 잘 보살펴 주기로 다짐했다.
# 엄지 + 3
11월 26일 금요일
퇴근 후 후배 B와 셀프 사진관 갔다가 저녁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두피에 땀나는 일 없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어서 흡족한 마음으로 퇴근. 결혼 후 체중이 증가해 사진관에서 직면한 현실 모습에 꽤나 당황함. 어찌어찌 결과물은 잘 나왔지만 속으로 다이어트 의지 불태움. 밥을 먹으러 가서 3일 뒤 생일을 맞이하는 후배에게 준비한 선물과 편지를 건넸다. B가 무척 좋아해서 나도 기뻤다.
돈 쓰는 일 생길까 쫄아 살던 때 마음에 빚이 있던 사람들에게 보은 하는 일로 즐거운 요즘. 이 날도 그런 날이었다. B가 스물셋인가 둘일 때 우리는 계획이 살짝 틀어져 충동적으로 어느 근사한 루프탑 바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스물여섯인가 일곱) 각자 칵테일 두어 잔씩 먹었고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당황했고 그런 적이 있었다. 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므찌게 신용카드를 긁고서 집 가는 길 버스에서 홀로 다음 달 카드값 걱정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다음날 B가 자신의 몫을 나에게 부쳐왔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 고마운 마음만 받고 정말 그 돈은 안 받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러지 못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받고서 다짐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나서야 마음을 갚았네. 집 오는 길 너무나도 행복했다.
# 엄지 + 5
11월 4주차
엄지 리포트 + 7.5
순간순간 행복한 일이 많았고 나의 겉과 속을 스스로 돌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주간이었다. 자존감 올라가는 소리가 우리 집 현관은 확실히 넘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