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버스 맨 뒷좌석,
나는 품에 안은 망원경 케이스를 신줏단지 모시듯 꽉 쥐고 있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붉은 미등의 강물로 변해 있었고,
버스 안은 사람들의 피로 섞인 한숨과 정체되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온 신경은 오직 등 뒤에 메고 있는 이 묵직한 하드 케이스,
그리고 낮에 만났던 그 수리점 주인이 남긴 마지막 말에 쏠려 있었다.
'마음의 파장을 잡아낸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수리점의 주인,
은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냥 듣기 좋은 위로일 뿐이야, 감성적인 상술에 넘어간 거야'
라고 비웃고 있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본능은 묘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로등 불빛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찬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지만,
패딩 점퍼 안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현관문 도어록을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띠리릭- 삑.
"바람아, 나무야! 아빠 왔어!"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가장 먼저 달려 나온 건 역시 막내 '나무'였다.
"냐아앙! (아빠! 왜 이제 왔어! 간식은?)"
풍성한 치즈색 털을 휘날리며 나무가 현관 중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시베리안 종 특유의 사자 같은 갈기털이 복슬복슬했다.
나무는 내 다리 사이를 8자로 그리며 비비적거렸다.
현관 센서등 불빛을 받아
나무의 호박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장난기 가득한 유리구슬 같은 눈.
나는 허리를 숙여 나무의 보드라운 턱 밑을 긁어주었다.
"우리 나무, 밥 잘 먹고 있었어?"
나무 뒤로 작은 방을 훑어보았다.
매트리스 하나만 놓은 곳,
그 위에서 묵직한 실루엣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둘째 '바람'이었다.
바람 이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왔다.
"냐-앙."
굵고 짧은 울음소리.
마치
"아빠, 나는 튼튼하니까 걱정 마. 아빠나 정신 차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깊고 푸른 눈.
나는 그 눈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바람아, 아빠가 오늘 신기한 거 가져왔어. 이따가 밤 되면 보여줄게."
나는 바람 이의 매끈한 등을 쓸어내렸다.
녀석은 기분 좋은 듯 골골송을
부르며 내 다리에 몸을 더 밀착해 왔다.
그 든든한 위로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베란다로 향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베란다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나는 패딩을 껴입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완벽한 관측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자, 시작해 볼까."
나는 케이스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삼각대를 펼쳐 수평을 맞추고,
그 위에 묵직한 경통을 올렸다.
낮에 그 남자가 손봐준 덕분인지,
15년 묵은 먼지가 무색하게 나사들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끼릭, 끼릭.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손끝에 닿는 금속의 냉기가 오히려 뜨거워진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조립을 마치고 나니 제법 그럴듯한 천체 관측소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나는 스마트폰 나침반 앱을 켜서 남서쪽 하늘을 찾았다.
어제, 그리고 그저께 나를 홀렸던 그 별.
"찾았다."
아파트 단지 너머, 검푸른 하늘에 홀로 외롭게 떠 있는 별 하나.
여전히 그 별은 묘한 리듬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마치 누군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숨을 쉬는 것처럼.
나는 파인더(보조 망원경)를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잡았다.
십자선 중앙에 그 빛나는 점을 위치시켰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맑게 했다.
나는 접안렌즈에 오른쪽 눈을 갖다 댔다.
속눈썹이 렌즈 고무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보인 것은 검은 허공이었다.
나는 천천히 초점 조절 노브를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흐릿하던 빛의 덩어리가 점차 작아지며 또렷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 한가운데에 작은 빛의 점이 맺혔다.
어제는 곰팡이 때문에 뿌옇게만 보였던 그 별이,
오늘은 시리도록 맑고 투명하게 보였다.
그 수리점 주인이 발라준 특수 약품 덕분인지,
아니면 곰팡이가 사라져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눈앞에 있는 가로등을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깨끗하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별이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억 개의 별 중 하나.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색깔이 다채롭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표면의 무늬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멀리 있는, 차가운 가스 덩어리일 뿐.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역시나.
그 남자의 말은 그냥 듣기 좋은 위로였나 보다.
마음의 파장이니 뭐니 하는 건 감성적인 은유였고,
나는 그 말장난에 놀아난 멍청한 호구였을 뿐이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떼려 했다.
"......"
그때, 낮에 수리점에서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배율 노브를 끝까지 돌려보세요. 믿음이 강할수록 더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믿음.
이 망원경은 과학 도구가 아니라고 했다.
마음을 보는 도구라고 했다.
나는 망원경 옆에 붙어 있는 '줌(Zoom) 아이피스'의 노브를 만지작거렸다.
보통 고배율로 갈수록 상이 어두워지고 흔들려서 잘 안 보이게 마련이다.
천문학 상식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과학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성이
"멈춰, 그래봤자 픽셀만 깨질 뿐이야"
라고 말할 때, 내 손가락은 이미 노브를 돌리고 있었다.
끼릭, 끼리릭.
배율이 높아지자 별이 시야에서 벗어나려 했다.
나는 미세 조정 나사를 돌려 별을 집요하게 시야 중앙에 고정시켰다.
별이 점점 커졌다. 점이 아니라, 하나의 '구(球)'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순간 별이 하나가 아닌 것 같았다.
'더... 조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