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기다림은 늘 짜증 그 자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으로 쇼핑을 하거나 타인의 인스타그램을 눌러대며 손가락만 쓴다. 어렵게 낸 시간이 소중하기도 했거니와 계획에 없던 소비와 SNS로 시간 낭비를 하는 기분이 유독 싫었다. 밥 먹듯이 약속 시간에 늦고 미안한 기색도 없는 친구들에겐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주문이 밀려서 음식 조리하는데 최소 30분 이상 걸립니다. 괜찮으실까요?” 주말, 사람 많은 레스토랑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하지만 30분이 1시간이 되면 스멀스멀 화가 난다. ‘최소’의 전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면 쉽게 참을 수 없었다. 마치 나의 배고픔을 화풀이하듯 컴플레인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쏟아냈다. 기다림이 짜증을 유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대상이 타인과 사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다림을 기꺼이 반기게 된 것은 그 시간을 주도적으로 온전히 나를 위해 활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이제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하면 괜스레 웃음이 나고 콧노래까지 나온다. 웬 떡이냐 싶다. 뭐부터 할까 고민을 하다가 엄마 모드 돌입한다.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고민하던 아이 옷을 다시 신중하게 골라본다. 어느 날은 작가 모드로 브런치에 접속해서 글벗이나 관심 작가들의 글도 읽는다. 타인의 글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엿보며 글 소재를 고민해 볼 때도 많다. 독서가 모드인 날은 책을 꺼내 아이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종이 책이 없으면 e북 리더기로 이어서 읽는다. 또 다른 날은 주부 모드로 가계부를 업데이트하고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알뜰하게 예산을 책정하고 자산을 불리려 안간힘을 쓴다. 대단하지 않지만 평소라면 단 5분이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 모든 걸 하려면? 도합 최소 30분은 족히 필요하다.
게다가 이상하게 기다리는 시간에 집중이 더 잘 된다. 몰입하느라 시간도 무지 빨리 간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일까? 일행이 하나씩 도착하면 행복한 꿈을 꾸다 말고 출근 알람 소리에 갑자기 깨어난 기분이 든다. 오히려 제시간에 온 일행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야속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기다림에 지쳐 짜증 낼 일이 줄어드니 더러운 성격이 온화하게 개조되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말한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을 3 가지 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 가지가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건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물론 이 3 가지 모두 어렵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방식인 책, 메모, 사색 등으로 도구를 바꿔보니 시간을 달리 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타인들을 살펴본다. 책을 읽고, 무언가 메모하고, 혹은 이어폰을 꽂고 가만히 사색하는 이들. 달라 보인다. 생각이 깊어 멋있는 말을 내뱉고 목소리도 매력적일 것만 같다. 자존감이 충만하고 가치관이 명확하게 곧추서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각자의 도구를 사용해 주도적으로 시간을 쓰는 사람들에게 갖는 나만의 시각이다. “나라는 인간도 바뀔 수 있나? 나도 달라 보일까?” 묘한 기대감과 함께 기다림은 어느새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