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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이 Sep 29. 2023

불편한 말을 꺼내는 이유


최재천 교수님의 영상을 보고

느낀 점을 가볍게 기록해 본다.


"짧은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런 경우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있겠어요"

-최재천의 아마존 중


하버드에서 수학 문제를 냈을 때

학생들이 잘 풀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랐던 경험.



그리고 같은 문제를 서울대에서 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문제를 잘 풀었던 경험.



그 경험들에 대한 최 교수의 대답이다.




"수학 문제 풀이가 꼭 필요한 경우에

책을 보고 풀 수 있는 정도의 능력

그 정도면 된다."




최 교수의 말에 많이 공감한다.

원리나 과정을 이해하면 답을 찾는 건 수월하다.

굳이 그 원리나 과정을 외우고 

심지어 답까지 외울 필요는 없는 거다.



인생엔 늘 변수가 있다.

고정적인 건 수와 공식과 답뿐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변수가 개입한다.

같은 공식을 대입해도 늘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최 규수가 지적하는 또 다른 하나는 

말을 아끼는 게 미덕이라 치부되는 한국의 풍토다.



나 또한 대학 시절 그걸 많이 느꼈다.

나는 보통 모범생이라 불리는 부류였다.

맨 앞줄에 앉아 교수와 눈을 마주하며 수업을 들었다.

수업 시간이 끝날 즘 형식적으로 이어지는 '질문 있나?' 시간에도 

나는 손들어 질문하길 좋아했다.

토론 수업이나 조별 과제를 등 그룹 활동을 할 때는 항상 조장을 맡았다.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 즐기는 성격 탓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따로 있다.

내가 그렇게 앞으로 나서는 건 내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탓도 컸다.



당시, 학교에서 누군가의 앞에 서 말한다는 건,

손을 들어 질문을 한다는 건,

잘난체하거나 교수에게 아부를 한다는 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의견을 내는 것이, 혹은 의견을 갖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내가 맨 앞에 앉는 이유는 그런 불편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서가 크다.

만약 중간이나 뒤편에 앉았다면

수업이 끝날 즈음 '질문 있나?' 시간에 손들어 질문할 때,

앞 줄에 앉은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만 했을 거다.





토론 수업을 진행할 때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분명 토론 수업인데 질문이 없다.

모두 자신이 준비해온 '사회적으로 용인된 정답'만을 답하기 바빴다.

마치 "나 이만큼이나 공부해 왔어요"를 자랑하는 웅변대회 같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건 쉽지 않다.

대단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배들의 '정답'에 대한 도전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협의에 반기를 드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보통 그런 토론의 주제는 '성매매, 사형제도, 범죄인 인권' 등

사회적으로 선/악이 구분되어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토론이 이뤄지기 쉽지 않다.

누구도 튀고 싶지 않아 하고 틀리고 싶지 않아 한다.

아무도 악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론할 여지가 없는 토론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억지로 라도 반대편에 섰다.

비록 나도 마음은 '사회적 합의'의 편에 서지만

토론 수업을 재미있게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불편한 질문을 하는 바보 역할을 자청했다.



낙태 제도에 찬성을 하고 성매매 양지화를 주장하는 역할을 했다.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물론 일반적으로 두들겨 맞는 입장이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반론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불편한 질문을, 틀린 질문을, 엉뚱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최 교수의 영상 끝에 나오는 '다양성'에 관한 의견이 

아마 그런 결에서 나온 말 일거라 생각한다.



같은 것이 모인 곳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긴 힘들다.

서로 다름이 모일 때 비로소 새로움이 탄생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다른 역할을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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