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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속한다는 용기

by 오제이



얼마 전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함께 뉴스를 보던 지인이 한탄하며 말했다. ‘자살할 용기로 살지...’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수긍이 됐다. ‘그래. 우울증을 겪지 않는 사람은 이런 일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날 나는 일반인은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르고 또 그리 관심 있지도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 말이 나온 이후, 나는 그에게 ‘자살은 쉽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자살 충동을 이겨내고 삶을 지속해 나가는 게 더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그렇다. 죽는 것은 쉽고 사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도 같다. 문제에 부닥쳤을 때 그것을 회피하고 돌아서는 것은 쉽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것은 어렵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문제는 삶이다. 정확히는 삶의 무료함과 무기력함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이다. 극단적 선택 말고도 해결책은 있겠지만 가장 쉬운 도피는 그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것. 그것은 한 번의 충동으로 끝낼 수 있다. 반면, 삶을 지속하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과 같다. 만일 당신이 도전에 의미도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보다 큰 고통의 연속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에 이르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해서 따로 찾아볼 필요도 없다. 이미 뉴스나 각종 매체를 통해 쉽고 빠르게 죽는 법이 공유된 터라, 어린아이들도 모두 알 정도다. 꽉 막힌 공간에서 연탄불을 피운다던가, 높은 난간 위에 서서 발에 조금만 힘을 줘 균형을 무너뜨리면 된다. 혹은 날카로운 물건에 손을 대거나, 호흡을 인위적으로 멈추는 방법도 있다. 그것을 시도하는 두려움은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고통에 비해 아주 작고 짧은 두려움일 뿐이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에게 ‘자살할 용기로’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삶을 지속하는 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금 더 모범적이고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렇게 힘들면 도움을 청하지’라던가,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같은 말이 그나마 상처 받지 않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도움되는 말 같은 건 없다.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움직여야 한다고 백 번 이야기하면 백 번 흘려듣는다.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 해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라고 말한다. 그들은 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움직일 힘과 의욕이 생기지 않을 뿐이다.



그럴 땐 그저 말 없이 손 내밀어주고 먼저 다가와 주는 것이 최고의 도움이다. 아무런 말 없이 손 잡아 주는 일, 그리고 속 이야기를 들어주며 눈을 깊게 들여다봐 주는 일이야말로 실질적인 도움이다. 쑥스러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투정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서면 그 정도 투정은 귀엽게 느껴진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단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그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 삶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일. 그것이 우리가 그들의 동반자이자 동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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