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야근을 하다 '가짜 열심'을 깨달았다

by 오제이


어제는 회사 업무가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저녁을 먹고 일해야 할 정도로 긴 본격적인 야근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야근이 아니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모호한 야근이었다.


일이 늦어진 이유는 클라이언트가 자료를 늦게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데, 마냥 그들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으므로 이 야근의 원흉이라 탓하기는 다소 무리였다.


나는 어차피 공식적인 업무 시간이 끝나기도 했고, 중요한 일을 대부분 마무리한 터라 개인적인 할 일을 했어도 괜찮았지만, 괜한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뼛속까지 노비 마인드인가 남아있는가 보다.


그래도 나는 평소 일과 중에는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갖는 편이다.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삶에 도움 되는 짧은 영상을 보며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혈액형이나 MBTI 같은 걸 믿지는 않지만, 내가 어떤 유형인지는 제법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 웹서핑을 하다 내 유형과 관련된 글을 보면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최근에는 이런 글을 보게 됐다.


<회사를 대하는 자세와 관련된 MBTI 별 유형 분류> 같은 류의 글이었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평소 보던 것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내용이었지만, 한 가지 문장만은 눈에 띄었다.


"이 유형은 자기가 회사의 주인이라 착각함, 일종의 주인의식을 가진 노예임"


웃기려고 쓴 문장이겠지만 한편으로 가슴이 쓰렸다. 결국 맞는 말이니까. 회사에 소속된 상태로도 얼마든지 자기 발전을 이룩할 수야 있겠지만, 결국 회사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주요 시간을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사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의 야근에서 나는 그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가슴속에 회사에 대한 회의와 서글픔이 옅게 깔렸다. '내가 어쩌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퇴근길을 걷는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그것은 나의 허비된 시간에 대한 소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간, 내가 나의 일을 주저했던 태도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몰라 방황했다. 그렇게 어젯밤은 무거운 짐을 안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차가운 물로 정신을 차린 뒤,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천천히 세심하게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부분을 하나씩 곱씹어 봤다.


<가짜 열정>


정답을 찾았다. 나는 그냥 열심히 사는 척했을 뿐, 진짜 미친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꾸준히 사니까 이만하면 됐지'라고 대충 위안 삼아버렸다.


'가짜 열심'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지금 사는 삶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지금 행복하지 않냐고 말하며, 가짜 열정이 주는 알량한 안정감에 취해 어디로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가슴속 꺼지지 않는 공허와 답 모를 위기의식. 그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선 가짜 열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것은 알면서도 하기 힘든 일이다. 만약 이것이 찬물 샤워 같았다면, 뒷골이 당길 만큼 차가운 물로 목욕하는 것처럼 단숨에 참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백 번도 더 해냈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새롭다.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돼' 같은 수동적 마음가짐이 아니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진짜 열정을 갖고 산다'는 어떤 확신이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확신이 차오르고, 수많은 좋은 결심을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결과는 같아진다. 반드시 움직이고 도전해야 한다. 실천만이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시작했고 오늘은 지난 수 년과는 다른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이 작은 불씨가 불꽃이 되어 타오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힘차게 걸어가 본다.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합니다.

오제이의 <사는 게 기록> 블로그를 방문해 더 많은 아티클을 만나보세요.

https://blog.naver.com/abovethesurface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체력이 있을 때는 누구나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