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보다 늦게 퇴근한 저녁, 비가 내렸다. 쏟아붓는 비가 아니었다. 안개처럼 부옇고, 살에 스미듯 부드럽게 날리는 비였다. 전철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서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진한 비 냄새가 풍겼다. 장대비보다 이런 날, 기습적으로 촉촉해지는 이런 날의 공기가 더 진하게 비의 향을 머금는 듯하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탓에 우산은 없었다. 날씨 앱을 켜 보니 곧 그칠 비라 했다. 30분이면 잦아들 거라지만, 집까지는 고작 10분 거리. 그 몇 분을 피해 지하철역 안에 갇혀 있기엔 저녁이 너무도 귀했다. 나는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외투와 셔츠를 벗어 가방에 넣고, 속옷처럼 입고 있던 하얀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 길을 나섰다. 오래지 않아 빗방울이 몸에 스며들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 비가 굵어지지 않아 촉촉함이 축축함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미스트처럼 비가 내리는 서울의 밤거리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안경렌즈 위로 맺힌 물방울들이 헤드 램프를 흩트리고, 그렇게 번진 빛들이 세상을 동화처럼 바꾸어 놓았다. 매일 걷던 길인데도, 이 밤만큼은 처음 보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서 사진기를 꺼내 들었다. 마치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순간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문득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를 처음 유치원에 데려다주던 날, 현관을 나서자마자 몇 걸음마다 멈춰 서는 아이를 보며 한참을 길 위에 있었다고 했다. 푸른 잎사귀도, 개미 행렬도, 색색의 꽃도 사람도, 세상 모든 게 처음이라 신기했던 그 녀석. 목적지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 그땐 그저 귀엽게만 들렸는데,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다.
비를 맞으며 걷는 이 순간, 내 눈에 담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고 예뻐 보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시선만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세상이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같은 것을 보고도 좋은 점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점만 골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것만 골라보는 사람은 분명 아름다운 눈을 가졌을 테다. 아름다운 눈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비춰 보일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얼마나 다채롭고 눈부실까. 언젠가 나도 그런 눈을 가질 수 있을까. 그저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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