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발 사이즈도 몰랐던 거예요? 놀랍네.”
아내는 내가 자신의 발 사이즈를 헷갈려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나는 그런 일로 놀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아마도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기억 속에 남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취향 하나, 익숙한 습관 하나까지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에게 온전히 기억된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의 증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면, 그걸 누가 기억해 줄까.
얼마 전 영화 《퓨리오사》를 봤다. 임모탄 조를 신처럼 따르는 워보이들이, 죽음을 앞둔 순간 팔을 높이 들어 외친다. “기억해 줘!” 그러자 주위의 워보이들이 깍지를 끼며 외친다. “기억할게!”, “기억했어!” 전쟁과 광기로 점철된 그들의 외침이 우스워 보여야 마땅했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짙은 슬픔에 잠겼다. 자신의 죽음이 의미 없지 않기를, 누군가의 기억 안에라도 남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외마디 외침 하나에 담긴 존재의 갈망이, 비록 광신도일지라도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붙드는 존엄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죽음보다 위에 있다. 육신은 사라져도,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다른 방식의 영생이 아닐까. 기억해달라는 말은 곧 사라짐을 거부하는 우리의 몸짓이며,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또한 그 갈망과 다르지 않다. 생각들이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기를, 이 마음의 파편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를 바란다.
결국 나도 이 시대의 워보이다. 매일같이 글로 싸운다.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소리 없이 외친다. 기억해달라고.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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