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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산책

by 오제이


점심을 마치고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평소라면 저녁에 했을 일이지만, 최근 들어 부쩍 선선해진 날씨 덕에 일찍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 집에는 ‘재활용을 하고 나면 동네를 한 바퀴 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억지로라도 정해두어야 발걸음 수가 조금이나마 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집순이, 집돌이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누워 있으면 그곳이야말로 피서지이자 극락이 아닐까.


그렇다고 매일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건강을 챙기려면 하루에 한 시간쯤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재활용 산책’이라는 규칙을 성실히 지킨다. 코스는 늘 비슷하다. 다이소를 다녀오거나,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르거나,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사 오는 정도다. 보통은 반경 200~300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짧은 길이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왔으니 조금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정처 없이 오 분쯤 걷다가, 아내가 백화점에 가자고 제안했다. 딱히 살 건 없었지만 구경 삼아 가보기로 했다. 여름날에 백화점이나 마트만큼 좋은 피서지는 없다. 시원하고 쾌적할 뿐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할 것들이 가득하다. 우리 부부는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백화점은 언제나 환영이다.


한참 걸어 도착한 백화점에서 우리는 늘 그렇듯 외국산 생활용품 코너부터 들렀다. 살 것도 아니면서 괜히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했다. 예전에는 충동적으로 이것저것 사기도 했지만, 그렇게 쌓인 물건들이 집 구석에 방치된 걸 보고 나서는 이제는 구경으로만 만족할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식료품 코너는 이야기가 다르다. 먹고 사라지니 부담이 덜하다. 게다가 수입 식품은 종류가 자주 바뀌어, 새로운 여행지에 발을 들이는 듯한 기분을 준다. 오늘도 생활용품 코너를 한 바퀴 돈 뒤, 지하 식료품점에서 또 한 바퀴를 돌았다. 결국 손에 든 건 없었지만 눈여겨본 상품은 많았다. 동료 생일에 선물하기 좋은 초콜릿과 세트 상품들을 마음속으로 ‘찜’해두었다. 막상 생일 날이 오면 잊어버리기 일쑤니 메모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근처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열심히 걸은 뒤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어차피 먹을 거라면 차라리 걸음이라도 보탠 게 낫다 싶었다. 짜장면과 짬뽕 한 그릇씩을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잠깐 외출만 하려던 게 예상치 못하게 긴 시간이 되어버렸다. 허탈함이 스쳤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운동도 했고, 맛있는 저녁도 먹었고, 무엇보다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건 좋지만, 너무 강박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다독여 본다. 느슨해진 것일 수도, 나태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유연함을 배우는 과정’이라 부르기로 했다. 내가 만든 계획 때문에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는 것. 지금 내가 가장 열심히 익히고 있는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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