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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일, 카페에서 만난 멘토

by 오제이


휴일을 맞아 카페에 들렀다. 멀리 나갈 것 없이 동네 스타벅스로 향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2층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스마트폰에 도착한 알림에는 대기 번호 1번이라는 문구가 떴다. 금방 나올 줄 알고 카운터 앞에서 기다렸는데, 내 차례가 오기 전 열 명이나 음료를 받아 갔다. 이상하다 싶었다. 알고 보니 브루잉 커피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새로 내리느라 오래 걸린 것이었다.


잔에 가득 담긴 커피를 들고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우리 동네 카페는 유독 인심이 넉넉해 늘 컵을 가득 채워주는데, 그래서 오히려 계단을 오르다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리에 도착해 보니, 옆자리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아직 주문하지 않은 걸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아내는 노트북을 열어 자신의 일을 정리했고, 나는 책을 펼쳐 서문을 읽었다. 그 무렵 옆자리 여성에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의 만남인 듯 서로 웃음을 터뜨렸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알 수 없는 낯섦을 느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여자는 단정한 오피스 룩에 젊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고, 남자는 머리가 듬성듬성 벗겨진 채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텀블러 하나만 덜렁 들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남자가 여자의 커피를 얻어 마신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을 읽는 척했지만 귀는 이미 그쪽으로 열려 있었다. 대화는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남자의 일상적인 잡담에 여자는 매번 크게 웃고 박수까지 치며 반응했다. 운동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수술 이야기까지 주제는 수시로 바뀌었지만 여자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여자가 슬쩍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 수술은 좀 어떠세요? 보험료는 받으셨죠?” 그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그녀는 보험 설계사였다. 아마도 이 만남의 목적은 영업 상담이었을 것이다. 남자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챈 듯 미묘하게 표정이 바뀌었지만, 불편해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차근차근 들어주었다.


여자는 준비해온 말을 풀어놓았다. 지금 들고 있는 보험이 몇 개인지, 그 내용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결국 그녀가 권한 조회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동의했다. 권유인지, 강요인지 모호한 분위기였다.


이후 대화는 깊어졌다. 보험료 체계, 수당 구조, 설계사의 수익 방식까지. 여자는 정직함을 강조하며 자신을 차별화하려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표정은 굳어갔다. 여자가 준비한 말들이 무용해지는 순간처럼 보였다.


그러다 여자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표님, 제가 보험 권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아시는 분께 저 같은 정직한 설계사가 있다고 소개만 해주시면 돼요. 괜찮으시죠?”


남자는 잠시 여유 있게 웃더니 명함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래, 해줄 수는 있지. 그런데 내가 더 걱정되는 건 따로 있어. 네가 이렇게 해서 언제 부자가 되겠니? 다른 사람은 한 명 만날 때 너는 열 명 만나야 하잖아.”


‘네?’

“정직하게 일하는 것과 미련하게 일하는 건 다른데, 그래가지고 큰돈 벌 수 있겠어?”


그 말은 충고 같으면서도 따뜻한 조언처럼 들렸다. 그는 돌려 말했지만, 요약하면 이랬다. 정직함은 덕목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에서 크게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 범죄가 아니라면 돈을 벌 방법을 고민하는 것 또한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남자의 태도에서 묘한 인상을 받았다. 텀블러를 흔들며 들어온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지고, 수많은 풍파를 헤쳐온 한 기업인의 경험과 무게만 남았다. 여자의 목적이 영업이었다 해도, 그는 끝까지 진심으로 그녀의 앞날을 걱정하는 선배로 남았다.



옆자리 풍경을 지켜본 짧은 시간. 나는 뜻밖의 존경심을 품었다. 여자가 그와 같은 선배를 가까이 두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배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뜨거운 커피와 함께 마음속에 짙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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