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17
오전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막 잠에서 깬 도시가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사방으로 긴 줄기를 뻗어 그늘을 만든 나무 아래엔 동네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무성한 나뭇잎 틈새로 부서지는 햇살이 그들 머리 위에서 빛났다. 늦은 아침을 해결하려는 관광객들이 어슬렁 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기다렸다는 듯 음식점의 알전구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몇 번을 갔지만 한 번도 실망한 적 없는 '오리비'에서 쌀국수와 스프링롤을 먹고 아들은 호텔로, 나는 바로 옆 마사지 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그때 호이안에서의 우리 루틴이었다. 내가 단골로 삼은 '선라이즈'라는 이름의 마사지샵은 '일출'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지만 주인아저씨가 소박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곳이었다. 그 샵은 아주 작은 곳이어서 상주하는 마사지사가 없었다. 내가 오면 주인아저씨는 전화로 누군가를 호출했고, 꽃잎을 푼 대야에 내 발을 담가놓고 시간을 벌었다. 나는 붉은 꽃잎과 초록 잎사귀들이 둥둥 떠다니는 푸른 대야 속 발을 보며 호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거나 낮잠을 잘 아들을 생각했다. 같이 마시지를 하자고 할 때마다 아들은 "뒹굴거리고 싶어요."라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지치도록 뒹굴거리렴."
'전학 가자'는 내 말에 아들이 반응한 것은 그로부터 2주 후였다. 그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엄마, 저 재수시켜 줄 수 있어요? 그럼, 한번 해보려고요."
우리가 사는 D시는 전국에서 교육열로 유명한 학군이 있는 곳이었다. 성적 상위권의 많은 학생이 그 동네 출신이었다. 그리고 학교가 '글로벌'을 내세운 만큼 이중국적자이거나 하다 못해 방학마다 연수정도는 갔다 왔을 정도로 학생들의 어학실력이 좋았다. 외국어가 중심이 아닌 학교인데도 그랬다. 아들은 그런 도시의 북쪽 끝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자리에서 나고 자란 동네 토박이였다. 특목고는 아들이 처음 경험하는 낯선 세상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한 인간에게 있어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 생각하는 엄마였고, 그래서 아이의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잘하면 기특했지만 못한다고 안타깝지도 않았다. 대치동이나 이 도시의 대단한 교육열은 별난 엄마 몇몇의 소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상위권의 아이들은 이미 완성형으로 입학해서 수능을 칠 때까지 그것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고등학생에게 공부는 중요했다. 성적이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그들이 진학할 대학 서열이 아이들의 서열이었다. 나는 무지하고 순진한 학모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3년 안에 따라 잡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
해보겠다고, 견디고 버티겠다는 아들이 너무 대단해서 나는 우울했다. 나는 견디고 버틸 아들만큼 대단하지 못해서 그 힘겨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순진한 엄마였을지는 몰라도 약한 엄마까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시켜줄게. 성적이란 게 200점 300점 400점 계속 올라간다면 모르겠지만, 100점이 끝이야. 아이들은 단지 일찍 출발해 먼저 도착해 있을 뿐, 결국 시간이 흐르면 너는 그곳에 닿아 있을 거야. "
아들이 기특한 결심을 했다고 해서, 내가 아들에게 들려준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서, 당장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했더니 놀라울 정도로 성적이 오르고 어느 날 1등을 차지하는, 그런 소설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아들은 용기 내어 담임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담당 과목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아이는, 외국에 나간 유학생처럼 영어 선생님 말을 녹음해 수업이 끝난 뒤 되풀이해 들으며 겨우 숙제를 해나갔다. 어떻게든 적응하고 싶었던 아들은 학생회장단선거에 나가 1년 동안 반 청소를 전부 도맡아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간부들만 가는 리더십 캠프에 일반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지원해 참가했다. 그리고, 상위권 아이들의 상징과 같은 학교의 가장 핵심 동아리인 정책연구동아리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냐고 묻는 절박한 학생에게, 담임이 담당선생님에게라도 데려다주었으면 어땠을까. 청소는커녕 자기 책상도 안 치우는 아이가 1년 동안 반 청소를 각오하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지원해 참가한 유일한 평학생인 아들을, 리더십 캠프의 학생 간부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명문대 바로미터인 정책연구동아리에서 아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사력을 다해 학교생활을 버티고 기숙사에서 돌아온 주말에 아들은, 무너질 듯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들의 닫힌 방문 앞에서 서성이다 거리로 나가 정처 없이 걸었고, 정신을 차려보면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밥상을 차리고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이 포기하지 않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는, 매일이 눈물겨웠다. 가엾고 애처로운 나날이 한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