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탯줄을 자르며 (5)

에세이18

by 이화정

야시장에서 구입한 과일과 호텔 옆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아들이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잭푸르트와 두리안,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망고와 망고스틴의 포장을 벗기고 나는 베트남의 대표맥주 사이공의 뚜껑을 땄다.

"내일은 뭐 할까?"

차갑고 알싸한 맥주의 탄산이 기도를 타고 내려가며 입 안에 쓴맛을 남겼다. 어느새 여행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두리안을 처음 먹은 아들은 목구멍을 미세한 털로 간지럽히는 느낌이 든다며 포크를 잭푸릇으로 옮겼다.

"엄마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아들은 잭푸룻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면서도 연이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응?"

나는 아이의 말이 퍼뜩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엄마도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요. 내일은 엄마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제가 엄마 하자는 대로 할게요."

아이는 맛없는 듯 맛있다며 입 안 가득 잭푸룻을 씹으며 말했다. 무심하게 툭 던진 말투였지만, 아이의 다정한 눈빛에서 이미 먹은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베트남의 푸르고 무성한 나무들이 특유의 향기를 담아 일제히 내게로 손을 흔드는 기분이었다.

아들은 알고 있었다. 자기의 힘듦을 자기만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서, 자기가 서러울 때마다 던진 폭탄을 내가 얼마나 아프게 감내해 왔는지를. 미끄러지듯 넘어가던 맥주가 컥, 목에 걸렸다.

다음 날은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조식을 먹으며 뭐 할지 생각해 봤냐고 아들이 물었다. 간밤 나는 잠들기 전에 안방비치에서 본 한 가족을 떠올렸었다. 그들의 부탁으로 아들이 사진을 찍어 주었던 가족인데, 젊은 부부와 어린 아들이 모두 베트남 전통복장을 입고 있었다. 푸른색으로 맞춰 입은 그들의 아오자이는 형광으로 빛나는 연두색 바다와 잘 어울렸다. 파도가 칠 때마다 까르륵 거리는 어린 아들과 그를 품에 안은 엄마의 미소가 파도처럼 너울거리며 반짝거렸다.

" 우리 오늘 하루, 커플로 베트남 옷 입고 여행하자."

말을 꺼내보긴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수염이 시커멓게 나기 시작한 열여덟 머슴아가 엄마랑 옷을 맞춰 입고 낯선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은, 누가 봐도 가오 떨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들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우리는 아오자이 대여점에 가서 운 좋게 주인이 막 포장을 뜯는 새 옷을 빌릴 수 있었다. 그 옷을 입고 호텔로 돌아와 호텔이 무료로 빌려주는 자전거를 골랐다. 아들은 정말 괜찮겠냐며 연신 나를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전거 안장의 높이를 낮추고 또 낮춰도 내겐 조금 높았다. 너 자전거 가르친 게 엄마야, 아들을 안심시켰지만 그건 젊었을 때 얘기 아니냐며, 영 못 미더워했다.

아들은 내 뒤에서 따라왔다. 여차하면 바로 달려올 수 있도록 나를 주시했다. 출근하는 현지인들의 자전거와 오토바이 무리 속에서 속력을 내거나 브레이크를 잡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엄마, 괜찮아? 차! 차! 조심해요. 같은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 나를 걱정한다. 내가 아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주위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과 나는 검고 살찐 소가 풀을 뜯는 동남아의 흙길을 내달렸다. 파란 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은 동화의 한 페이지 같았고, 도로 양 옆으로 그늘을 내어주는 열대의 나뭇잎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처럼, 내 몸을 통과해 나를 지나쳐지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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