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적 사랑의 전복顚覆, 춘향

독서록7

by 이화정

『열녀춘향수절가』를 읽고

‘처음’이 주는 상징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처음’이 기쁨이든 상처든 간에, 그것은 이제 이전으로는 절대로 되돌아가기 힘든 ‘사건’이 되어 인생을 강타한다. 수많은 ‘첫’ 중에서도 ‘사랑’이라면, 사랑 중에서도 ‘육체’를 나눠 가진 ‘정인’이라면, 살아생전 그보다 더한 무게로 삶을 장악하는 낭만적 문제는 좀체 없다.


『열녀춘향수절가』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열여섯 동갑내기 춘향과 몽룡이, 이별과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시련을 안기는 가장 큰 원인은 신분과 성性에서 기인한다. 춘향은 기생 어머니와 양반 사이에서 난 딸이고, 이도령은 시대의 엘리트 집안 자제인 말 그대로 귀공자다. 나는 춘향이, 이런 식민지적 풍토에서 어떻게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되어 해피엔딩을 맞게 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광한루에서 그의 부름에 못 이기는 척 응한 춘향은 이 도령을 ‘천하의 호걸이요. 세상의 기이한 남자라. 이마가 높았으니 젊은 나이에 공명을 얻을 것이요, 이마며 턱이며 코와 광대뼈가 조화를 얻었으니 충신이 될 것이라(p31)’ 여긴다. 춘향이 몽룡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출세의 예감이었다.

춘향에게 홀딱 빠진 이도령이 ‘너는 물이 되고 나는 새가 되고, 너는 종이 되고 나는 망치 되고, 너는 방아 구덩이가 되고 나는 방아 공이가 되자’고 사랑 타령을 하자 싫다고 대답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항시 어찌 이생이나 후생이나 밑으로만 되라니까 재미없어 못 쓰겠소. (p62)”

춘향은,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과 여자라는 성이 이중으로 짓누르는 식민적 세상에서 식민주체로 살 생각이 없었다. 양반 혹은 남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 여기지 않았고, 살아서도 환생해서도 ‘아래’에 있기를 거부했다.

춘향이 몽룡을 얻는다는 것은 ‘위’의 집단으로의 상승을 의미했다. 그가 서울로 떠나면서 어머님의 반대로 춘향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하자 ‘우리 둘이 처음 만나 백년언약 맺은 일도 대부인 사또께옵서 시키시던 일이 오니까?’라며 화를 내는 것은 그래서이다. ‘우리 모녀 평생 신세 도련님 손에 달렸(p80)’다거나 ‘나이 육순 나의 모친 일가친척 하나 없고 다만 독녀 나 하나라. 도련님께 의탁하여 영귀할까 바랐(p81)’더니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춘향의 ‘상승’은 변사또를 통해서도 가능했다. 실제로 춘향 어미 월매는 ‘자하골 성 참판 영감이 남원에 임시로 내려왔을 때, 수청을 들라 하옵기로 관장의 명을 못 어기어 모셨(p49)’다. 그리하여 비록 양반은 아니나 기생도 아닌, 모종의 신분상승이 딸에게 가능했다. 그러나 춘향은 아니었다.

물론, ‘나이는 이팔이요, 풍채는 두목지라. 도량은 넓푸른 바다 같고 지혜는 활달하고 문장은 이태백이요 필법은 왕희지(p14)’이며 ‘옥안선풍 고운 얼굴, 치렁치렁 숱 많은 머리 곱게 빗어 밀기름에 잠재(p17)’운 몽룡의 모습과 ‘문필도 볼 만하고 인물 풍채 활달하’다 해도 ‘풍류에 통달하여 외입 또한 좋아하되, 한갓 흠이 성격이 괴팍한 중에 가끔씩 미친 듯이 날뛰는 증상을 겸하여 세상에 아는 사람은 다 고집불통이라 하(p93)’는 변사또와는 비교가 불가한 일이지만, 신분상승 이전에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 흔들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춘향의 몽룡에 대한 사랑은 목숨을 건 베팅이었다. 올인이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엄마 말을 듣느라 울면서 애인을 두고 떠난 마마보이 몽룡은 이제 어엿한 사내로 성장해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삼는다.


첫사랑이 끝사랑이 된 이야기는 진부해도 행복하다. 아들 셋과 딸 셋이 모두 총명해 부친보다 낫다는 얘기는 뭔가 모르게 통쾌하다. 『열녀춘향수절가』는 위력과 차별을 이겨낸 열여섯 여자아이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수절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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