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책
우리 집이 돈이 없다 할지언정 돈을 절대 아끼지 않은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전자책이 대중화되기 전이었기에 우리 집은 무수한 종이책들로 가득 찼었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미국으로 이사 가기 전에 한국에서는 시골 주택에서 거주하였는데, 책으로 가득 메워진 방에서 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시골의 선선한 바람 냄새와 찬란한 햇빛 아래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빠 덕이 제일 크다. 아빠는 책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다. 선비가 제격인 우리 아빠는 독서를 즐겨하셨고 그 취미는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금도 나는 서점에 들르는 것을 무지 좋아한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 책은 절대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무수히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상상력도 풍부해서인지 책 한 권 한 권이 살아 숨 쉬는 것 마냥 정말 재미있었다. 책 한 장 한 장 펼칠 때마다 무궁무진한 세상을 헤쳐나갔다.
덕분에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던 나는 엄마의 수고와 더불어 책과 함께 외롭지 않은 유아기를 보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을 곱씹어보면 괜히 마음 한편이 따듯해지며 그때가 조금은 그리워진다.
미국에서 살 때에도 책은 큰 역할을 했는데, 책을 워낙 좋아해서인지 금방 언어가 트였다. 사실 언제 트인지도 모르고 책을 읽어대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정말 형편이 어려웠을 때인데도 내가 원하는 시리즈의 책이 새로 발권되면 꼭 사주셨다. 주로 학교를 통해 책을 구매하였는데,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월간지처럼 서적 판매 잡지를 나누어주었다. 잡지 맨 뒷장을 뜯어 구입을 원하는 책을 써서 내는 구조였다. 책을 구매하면 한 달 정도 뒤 구매한 책을 반으로 가져다주었는데 책을 받는 그 순간이 얼마나 설레었는지. 간혹 책을 사지 못하는 때에는 아쉬움에 고개를 숙이고 책 나눔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학교 도서관이나 공립 도서관에 가는 것도 정말 좋아했다. 그때의 시간과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긴 회상에 잠긴다. 공립 도서관에 파묻혀 책을 읽던 날들과 밖을 나서면 보였던 작고 예쁜 분수, 무엇 하나 싫은 것이 없었다.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이 날 때까지 읽었다. 밤을 새우다 엄마에게 걸려 혼이 나도 멈출 줄 몰랐다. 그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아마 <초원의 집> 시리즈 일 것이다. 입학하자마자 1학년에 처음 접했는데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와 소소한 일상들이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잔잔한 시골 배경에 ‘로라’라는 이름을 가진 내 또래 아이의 인생을 엿보는 것은 참 재밌는 일이었다. 학교 행사에 <초원의 집> 연극 팀이 온 적이 있는데 정말 넋을 놓고 관람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소극장에 처음 눈을 뜬 계기기도 하다. <초원의 집>은 나중에 다시 한번 꼭 읽어보고 싶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제격인 책이다.
한동안 시간이 안 난다는 핑계로 게을리했지만 더 이상 핑곗거리도 없는 지금 다시 책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다. 아빠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나도 책 아까운 줄 모른다. 돈이 없어도 마음은 풍족할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의 양식을 넉넉히 채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