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갑자기 미국 학교에 던져졌을 때,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사실 기억은 잘 안 난다. 여섯 살 때였으니까 알파벳을 겨우 막 떼놓고 그 마저 가끔 몇 개는 헷갈리는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것은 안다. 그 와중에 무슨 깡이었는지 일찍 학교에 들어가겠다 우겨 나는 학급에서 막내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처음 학교에 간 날부터 나는 사고 아닌 사고를 쳤다. 긴가민가하면서도 눈치껏 받아쓰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옆 친구의 종이를 그대로 베껴 쓴 것이다. 그 와중에 양심껏 이름까지 베꼈다. 뭐라도 쓰긴 써야 하는데 당시 순수했던 나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어길 방법이 필요했다. 물론 바로 선생님께 불려 갔고,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다 느꼈는지 부모님까지 불렸었다.
이때의 수치심으로 인해 바로 다음 시험부터 공부를 해 가 그 뒤로는 웬만하면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덕분에 반 아이들이 믿지 못하며 선생님께 항의하는 탓에 제대로 시험 친 게 맞다는 걸 증명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재시험을 쳤었던가, 반 아이들 앞에서 스펠링을 나열했었던가, 그랬었다.
지역 특성상 유색인종이 정말 없는 곳이라 당연히 나는 눈에 띄었고, 동시에 차별당했다. 학기 중간에 난입한 어리숙해 보이는 아시아인 여자아이는 관심은 끌지언정 쉽게 그들 사이에 섞이지 못했다. 게다가 유학생의 신분으로 온 나와 달리 부유했던 지역 상 다른 아이들은 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나와는 생활 수준이 꽤나 차이 났다. 따라서 인내심을 갖고 접점을 점차 찾아나가야 했다.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야 하기 위해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했다. 웃기. 웃어 넘기기. 긍정의 힘을 극치로 끌어올린 것 같다. 아이들이 차별하거나 상처를 줘도 재빨리 잊어버렸다. 그나마 아이들이라 참 다행이었다. 부모님께서 겪으셨을 상황은 훨씬 더 고되셨을 것을 이제는 뻔히 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난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쉬이 울어본 적이 없다. 그저 덤덤히 받아내어 넘겼다. 누가 뭐래도 괜찮은 것처럼, 속상한 일이 있어도 상황을 다방면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잘 된 거라 여기기를 반복했다.
학기 중반에 가기도 했고, 유치원이 있는 초등학교라 다들 알고 지낸 지 꽤 돼서인지 이미 친구들은 다 단짝이 있었다. 나만 빼고. 꽤 오랫동안 그들 사이를 부유했던 것 같다. 다행히 크게 모난 아이는 없어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딱히 단짝이라 할 만한 친구는 없었다.
당연히 단짝이 없다는 사실은 속이 상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리고 난 아무래도 정말 괜찮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혼자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학교 내에서 시간이 날 때는 무조건 도서관이나 교실에서 책을 읽었기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친구 유무가 제일 중요한 시간은 점심시간 전에 recess라고 하는, 밖에서 노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종종 혼자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마가 알려준 70년대의 <캔디>의 주제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 노래를 부르며 그네를 쌩쌩 타고 있자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당시엔 그게 왜 문제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쓰다 보니 나도 별종이긴 별종이구나 싶다. 보통 정신머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결국 혼자 그네를 타며 논다는 사실이 선생님을 통해 엄마에게 들어갔다. 어쩐지 한 번씩 선생님이 오셔서 괜찮냐 물으시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괜찮다 했었는데. 좀 더 강력하게 어필할 걸, 당시에는 괜히 일을 크게 만드신 것 같아 답답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속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았다. 어느 날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나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혼자 그네도 못 타냐고 웃어넘겼다. 친구들과 잘 지내지만 내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기에 그네를 타는 거라며 엄마를 안심시켜 드렸다. 그 후로 다시 그네 타기가 두려워 선생님들에게 걸리지 않을 만한 발야구나 단체 줄넘기로 종목을 바꿨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며 영어도 자연스럽게 익히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 나의 평판은 어딘가 조금 모자란 아시아인 여자아이에서 똑똑한 아시아인 여자아이로 바뀌어갔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를 더 편안하고 익숙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학교생활도 잘하고 친구들 집에도 곧 잘 놀러 가고, 친구들도 집에 놀러 오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나도 모르는 새 그들과의 거리가 점차 허물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