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 채워져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 날을 계기로 나는 닌텐도 DS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의 쓸데없는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기적은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왔다.
지난주 1편에서 이어집니다.
여느 때처럼 엄마와 하교하던 어느 날, 내 생일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엄마가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있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설마. 쓸데없는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들 것만 같아 모르는 척했다. ”오늘 간식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코칩 쿠키가 나오나요?” 하며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게임기가 뭐라고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로나 엄마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확신이 생기자 기쁜 마음보단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어째서? 어떻게 엄마는 그 비싼 게임기를 샀을까? 그래, 말이 안 되지. 그랬을 리 없잖아. 아닐 거야.
애매한 미소를 띠며 나는 엄마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한 채 집으로 들어섰다.
엄마가 작은 상자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상자에는 내가 그리도 그리던 게임기가 그려져 있었다. 진짜 게임기였다. 은근 묵직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현실감 없이 포장을 뜯었다. 이 은은한 핑크색의 게임기가 나의 것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닌텐도 DS 라이트. 1년 전 남편이 생일 선물로 스위치를 사주기 전까지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게임기였다. 사실 게임에 크게 관심이 있다기보단 가볍게 즐기는 편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참 소중했다.
이 믿기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여쭤보니 정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던 분에게 나와 나이차이가 꽤 나는 쌍둥이 오빠들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생일날 Toys R Us에서 겪은 해프닝 (전편 참조)에 대해 듣게 되었단다. 그 이야기에 속이 상해 둘은 용돈을 탈탈 털어 나에게 게임기를 선물한 것이다.
놀랐다.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고마웠다. 쌍둥이 오빠들이랑 큰 교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나에게 고마운 사람들로 남아있다. 그때의 선물로 한참을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 모른다. 나도 더 이상 친구들이 게임기를 가지고 놀 때 옆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됐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이고 함께 교류할 수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은 항상 채워짐에 감사한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 한편에, 아무도 모르게 반발심이 일어났다. 게임기를 오빠들이 사줘야만 했던 이유를 알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네다섯 살 차이 나는 오빠는 사줄 수 있지만 부모님은 사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삼키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 엄마와 그 이야기를 다시 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말씀하시길,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하나 사줄 걸,” 생각하셨다는 거다.
오락이 뭐라고. 가정에 무리해서까지 보태줄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아직 살아있는 동심에 순간 마음 깊이 동의했다.
오빠들에게 참 고마웠지만 그만큼 초라해진 것만 같았던 그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나 혼자 상처받았던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