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을 만나면
앞서 서술했듯 나의 여행은 첫날부터 위기였다. 문득 처음 짐을 쌀 때 스쳐 지나갔던 생각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장기 여행을 갔다가 얼마 안 가 돌아오기도 하지. 자기와 잘 안 맞는다면서.'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첫날 휴대폰을 잃어버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현금이 한 푼도 없는데 돌아가는 비행기표값은 어떻게 구하지? 도 문제긴 했다.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나는 다행히도 혼자가 아니었다. 서른 살 즈음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 했다. 이 남자는 어디에서 갑툭튀인고 하니, 시내 중심가에 떨어지자마자 우왕좌왕, 캐리어 두 개에 피아노를 끌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짐을 들어주겠다고 해 준 사람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부하직원과 함께였다. 넌 어디에서 왔니, 무엇을 하는 사람이니 등등 이야기하면서 내 짐을 호스텔까지 가져다주겠다고 묻지도 않은 친절을 보여준 그는, 내가 호스텔에 당도하기도 전에 핼쑥한 얼굴로 휴대폰이 없다고 하자 일단 자기가 머무는 호텔 라운지에서 사태를 정리해 보자면서 나를 끌고 들어왔다.
여행을 오자마자 곧바로 집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설명해 주니 그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스포츠 TV 중계를 위해 트빌리시에 왔고 자기네 회사에서는 꽤나 높으신 신분인 모양이었다. 이비스호텔은 트빌리시에서도 꽤나 비싼 가격의 호텔로 일박에 십만 원이 넘었던가 그 근처였던가로 기억한다.(이 나라에서는 거의 우리나라 힐튼호텔쯤 될 듯) 재력도 되고 괜찮은 직업에 성격까지 천사인 그 남자는 자기 맥북을 주면서,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 구글은 휴대폰을 찾아주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어. 한번 로그인해서 찾아봐.”
라고 권했다. 그러나 무계획적인 내가 구글에 휴대폰 잃어버렸을 때 대응할 수 있도록 설정을 해 놓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멍한 머리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상황부터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사태로만 이해하고 있었지 내가 국제 미아로 승격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얼굴도 덩달아 핼쑥해졌다. 그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우리가 만났던 자리로 돌아가 휴대폰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저 짐 좀 들어주려고 했을 뿐인데, 때아닌 휴대폰 찾기에도 동원되다니 다시 돌아보니 참 운도 없는 사람이다. 두 시간 남짓 나와 고생을 함께 한 남자는 결국 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들고 “혹시 못 찾게 되면 다른 해결방법은 없어?”라고 물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해결 방법은 한국의 은행에 전화하는 거야.”
그러자 그는 대뜸 자기 폰을 나한테 건네줬다.
“나 아직 전화에 충전금액 있어. 국제전화니까 몇 분이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있는 만큼 다 써.”
“아냐, 너 모르는구나. 여기서 한국이 얼마나 먼 데. 너도 알다시피 국제전화료는 통화료에 거리가 계산되잖아. 먼 거리만큼 국제통화료가 붙으니까 상상외로 비쌀 거야. ARS 음성 듣다가 꺼져버릴 거야. 이제까지도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너에게 더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지.”
해라, 안 한다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오늘 잠자리를 해결하고 내일은 한국 대사관에라도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갑자기 그의 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통화를 한 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니 폰 주웠다고 연락 왔어.”
우리는 리버티 스퀘어 앞쪽의 택시 아저씨들에게 달려갔다.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한 거야?”
“조지아 사람이야. 지금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있다고 주소를 불러줬어.”
행여라 폰 주운 사람 마음이 바뀔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천사 같은 남자는 택시 아저씨와 익숙한 솜씨로 흥정을 했다.
1. 일단 택시에 탄다
2. 2라리(우리 돈 800원)에 ‘갔다가 돌아오자’고 우긴다(...)
3. 택시 아저씨가 내리라고 한다.
4. 여기서 목적지까지 고작 2km라면서 언성을 잠깐 높인다.
5. 다시, 우리 내려주고 손님 없으면 너는 다시 돌아와야 하니 기름값만 아깝다고 말한다.
6. 그의 승리;;;
택시의 운전석 앞쪽 유리는 반쯤 깨져있었으며, 택시 아저씨는 혹시 2라리로 운전하게 된 것이 기분이라도 나쁜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광속으로 달렸다. 중앙선 침범과 신호 무시를 거듭하며 목적지에 도착해, 잃어버렸던 폰을 돌려받았다.
“넌 정말 운이 좋은 경우야.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폰을 찾는 것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는 정말 많은 것을 도와줬다. 짐도 들어주고, 휴대폰도 같이 찾아주고, 택시도 타게 해 주고(무일푼인 내가 택시를 탈 수 있을 리가! 그리고 탔어도 바가지 썼을 듯), 택시비도 내주고, 내 호스텔까지 다시 짐을 들어다 줬다. 이런 것을 두고 뭐에 씌었다고 하는 걸까. 고마워서 연락하고 지내자고 내민 내 폰에도 “괜찮다”며 전화번호조차 적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열심히 도와주고 자기 시간을 희생했으며 대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봐 전화번호조차 남기지 않은 남자. 보기 드문 아름다운 마음씨이며, 난 정말 운이 좋았다. 이게 영화였다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이라도 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고 하니,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내내 '수염 좀 깎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고결하고 자기희생적인 그에게 이 얼마나 미안하고 파렴치한 일인가!
나 자신을 비호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그의 수염이 테러에 가까운지에 대해서 설명해야겠다. 구레나룻부터 시작하는 복슬복슬한 그의 수염은 빨간 입을 동그랗게 빼놓고 뺨 전체에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서 수염을 기른 남자를 볼 일이 적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수염 앞부분은 몇 시간 전에 그가 무엇을 뜯어먹었는지에 대해서 장황히 설명하고 있었다. 옆에 부하직원도 있었는데 그가 높으신 신분이라 아무래도 이야기를 못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부위별 자기주장을 하는 듯한 이색적인 높이로 자리 잡아, 만수산 드렁칡처럼 사이좋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시를 온몸으로 구현하듯 맥락 없이 합체되어 있는 그의 수염은, 정말 미안하지만 아주 무성한 겨드랑이 털을 연상시켰다. 왠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 아버지 이치로에게도 잘 어울릴 만한 자유주의자의 수염이었다. 어쨌건, 세상의 소금 같은 마음씨의 남자에게서 수염만을 강렬히 바라보고 기억하다니 나는 정말 문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