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적인 조지안들
행운이 계속되는 여행, 이라는 걸 혹시 들어보셨는가? 내가 겪은 초기의 조지아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평생 한국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행운을 사용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인간의 혼은 어머니의 태내에 깃들기 전에 전 세계를 방황하다가 출생의 순간에 탯줄 채로 모체의 나라에 끌어당겨져 태어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여행자들은 자기가 봤던 천국을 찾아 그토록 정처 없이 헤매고, 마침내 그 나라를 발견했을 때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해서 그 나라에 정착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이 나라는 나의 영혼에 딱 맞는 장소였다.
어떤 면에서 그러하냐면, 첫째. 이 사람들 계획을 세우는 데 무신경하다. 플랜이 없다. 약속시간에는 번번이 늦거나 아예 안 나타난다. '조지안이랑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이 그대로 지켜질 거라고 믿지 마'라고 조지아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말하곤 했다.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파고들어가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웃음이 나올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 기사가 내일 오후 5시에 방문하기로 했다고 치자. 그런데 기사가 5시에 나타나지 않으면 조지안은 생각한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기사는 다음 주 오후 2시에 방문해서 사정을 이야기한다. 조지안은 용서한다. '맞아.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존재고 나도 완벽하지 않은데 내가 저 사람을 비난해서 뭐하겠어.' 물론 너그러운 마음씨는 인정할 만하지만, 이래서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단점이 있겠다.
둘째, 음악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하다 못해 길거리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광팬을 번번이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거리의 음악가들도 핑크 플로이드의 'We Don't Need No Education'을 연주하고 있다. 핑크 플로이드는 사이키델릭 록과 스페이스 록 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가사가 심오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홍대이든 강남이든 버스킹은 물론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에서도 핑크 플로이드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중에서 나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은 일단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내일 무슨 일을 할지,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해서 벌어먹을 지에 대해서 플랜도 확신도 의지도 없다. 심지어는 나보다도 고렙이다. 내가 레벨 10 정도라면 이 사람들은 레벨 58 정도 된다.
그래서 여행을 갔는데 돈을 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즉, 계속 얻어먹었다는 소리다. 이상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조지아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붙이고 밥과 술을 사줬다. 분명 그들도 자신이 가진 돈에 대한 계획이 있었을 텐데, 쓰고 싶은 순간 그걸 잊는 듯하다. 그래서 모 나라처럼 다 먹고 마신 다음에 계산서를 청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날 보고, '뭔가 베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함께 먹고 즐기고 한 뒤, '너의 여행을 축복한다'면서 진한 포옹을 해 주고 바이바이하고 사라진다.
이런 엄청난 행운이 계속될 리가 없어,라고 심각하게 고민하긴 했지만 행운을 즐겼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맨 처음 본 동양 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일까? 이런 행운은 일시적인 효과로 나중에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지아에서 머문 근 1년 간 그들의 친절은 질릴 정도로 맛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에 서술하기로 하자. 언제? 여행이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었다는 부분을 서술할 쯤에. 한국에서의 삶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고 원래 그렇듯 행운은 불행과 함께 온다. 나처럼 무계획적이고 대책이 없고 사기꾼 알아볼 줄도 모르고 꼼꼼하지도 전투력이 세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꽤나 헤비 한 무게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행운이 쌓일수록 불행도 몸집을 불리는 것인지, 결국 불행은 처음에는 작은 파장으로 시작해서 끝내는 엄청난 파장으로 나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행한 일을 서술하는 것은 나의 정신건강과 읽는 이의 쾌락 건강에 그다지 유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므로 일단 찾아왔던 행운 중 한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그의 이름은 조지. 트빌리시의 중앙에는 항상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술집이 있다. 젊은이가 북적이는 곳은 자고로 저렴한 술값과 너그러운 인심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지와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못했으며 그 역시 그 자신과 그 지역 사람에게는 바람직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혹시 내가 수풀 속에 들어온 것인가' 하는 감상밖에는 주지 않는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나보다 한참은 어렸다. 아마 스무 살 초반에서 중반 정도 되었을 거다. 그 역시 나에게 호의를 베푼 다른 조지안들과 마찬가지로 ‘나 배가 고픈데 식당에 같이 가자’라고 아주 가볍게 나를 초청했다.
그는 식당에 앉자마자 조지아 남자 이름의 절반은 조지고 절반은 기오르기라고 농담을 했다. (이후로 이 농담을 제각각의 조지아 인들에게서 50번은 듣게 된다. -_- 지겨운지고. 부연설명을 하자면 조지나 기오르기나 발음이 틀릴 뿐 같은 말이다. 고로 조지아 남자의 이름은 덮어놓고 조지(=기오르기)란 소리.) 그는 조지아에 처음이냐고 물은 뒤 자기 나라의 요리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킨 칼리, 하차 푸리, 오스트리, 버섯요리 등 6가지도 넘는 요리를 줄줄 시켰다. 너무 많은 요리를 시키는 바람에 종업원이 와서 “당신, 지불해야 할 가격이 이만큼인데 괜찮겠느냐?”라고 경고를 할 정도였다.
그는 킨칼리(*조지아식 만두)를 시켰는데, 잘 먹는 방법이라면서 먼저 시범을 보였다. 킨칼리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노말한 킨칼리와 튀긴 킨칼리다. 내가 킨칼리라고 하니까 그는 정색하고 힝!깔리라고 말해줬다. 노말한 킨칼리 안에는 육즙이 가득 차 있어 그냥 덥석 베어 물 경우 턱을 타고 즙이 줄줄 흐르는 바람에 좀비의 형상이 될 수 있으니 즙부터 빨아먹으라고 했다. 과연, 말을 듣고 조심해서 베어 물었는데도 즙이 턱을 타고 흘러서 재빨리 닦았다. 그는 내 첫인상이 좋다면서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첫인상을 믿어. 첫인상은 인간 본성의 기능인 직관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인간은 문명화되면서 직관을 잃어버렸지. 내가 최근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친구랑 돈을 동시에 잃어버렸거든.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돈을 빌려줄 때 직관적으로 뭔가 안 좋다는 느낌이 들었었어. 그런데 그걸 억지로 믿지 않았고,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어. 너 혹시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 읽어봤어?”
우리는 한참을 루시퍼 이펙트와 인간 본성과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악해지는 과정을 그린 것이 주 내용이다. 스탠퍼드 심리학과 명예교수 필립 짐바르도가 학교 지하에 교도소를 만들어놓고 지원자들에게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역할을 준다. 2주간 그들이 어떻게 되느냐를 관찰한 것인데 읽어본 분들도 있고 하도 유명하니까 결론은 생략하겠다. 사람들이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가혹행위가 선을 넘는 바람에 실험은 6일 만에 종료하게 된다. 즉 성선설과 성악설에 동시에 퍼큐를 날리는(?) 책 되겠다.
나는 돈 떼먹은 친구 이야기로 돌아갔는데, 조지는 그 친구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조지아를 조사(비록 하루인가 이틀인가밖에 조사를 못했지만)할 때 조지아 인들이 무척 관용성이 높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고, 악질 사기꾼이 들어오면 활개를 치겠구나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조지아 사람들의 성향은 한 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어?라고 물어봤다.
“조지아 사람들의 성향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래, ‘완전한 악은 없다(there is no pure evil)'를 믿는 달까. 혹시 네덜란드 아티스트 M.C.에셔의 그림 ‘악마와 천사’를 본 적이 있어? 내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행동을 한 사람이더라도, 심지어 연쇄살인범이라도,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에셔의 ‘악마와 천사’ 그림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을 100%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어떤 행동의 악함과 선함 역시 완전히 분리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하나의 원에 함께 존재한다고나 할까.”
밥을 다 먹고 나자 조지는 나에게 작은 선물을 줬으며 내가 계산하려는 것을 억지로 막으면서 내가 영수증을 보지도 못하게 구겨버렸다. 10년 된 친구에게서도 이런 융숭한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감동했다. 조지 때문에 단숨에 조지아가 좋아진 난 역시 조금은 단순할지도. 그때 조지는 갑자기 머리를 싸안으며 외쳤다.
“어떡하지? 나 3시에는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너랑 이야기하다 보니까 아침이 됐어! 출근해야 한다는 걸 까먹었네ㅜㅜ”
... 우리가 만난 것은 새벽 2시였다..... 이 에피소드에서 충분히 조지아인의 무계획성과 충동성을 알아볼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