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키우기 +D 109
집이 엉망진창이고, 가제 손수건이 온 집안 곳곳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설거지통에는 그릇들이 첩 첩 쌓여있고, 아기가 막수(취침 전 마지막 수유)때 먹고 난 젖병이 그대로 싱크대 안에 있다. 맘마 존에는 이유 모를 컵 여러 개가 제멋대로 놓여있고, 다 마시고 난 빈 생수병이 소리 없이 치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저귀 갈이대의 기저귀 칸에는 기저귀가 비어있는데, 마지막으로 기저귀를 갈았던 남편이 빈 채로 그냥 놔둬버린 채 새벽에 비몽사몽 간에 새로 뜯은 기저귀봉지가 아기 놀이박스 위에 그냥 놓여있다. 아기 기저귀 휴지통에 있는 어제의 기저귀는 쓰레기봉투 안으로 옮겨져야 한다. 아니, 그런데 살펴보니 남편이 밤중에 꺼내어 놓은 아기 기저귀가 아기 몸무게와 맞지 않는 M 사이즈다. 하아.. 다시 박스에 넣고 S박스를 꺼내 뜯고 정리해야 한다. 박스가 꽤 무거운데. 일이 두 배로 늘었다. 빨래 건조기에는 어젯밤에 넣고 잊어버린 아기 빨래가 그대로 들어있다.
아기는 잔다. 해가 뜨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겨울의 끝이라는 대한이고, 설이다. 남편은 한 달 전쯤에는 출근 전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좀 해놓고 출근을 하더니 그간 결산마감을 겪으며 체력이 저하되었는지 이제는 출근 15분 전에 간신히 일어나 자기 몸만 씻고 그냥 출근해 버린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의 집안은 해야 할 일 투성이다. 건조기 안의 아기 옷을 꺼내서 개고, 수납해야 한다. 재활용품 박스가 가득 차 있어서 밖으로 가지고 나가 버려야 한다. 아기가 깨면 따뜻한 물에 적신 가제 손수건으로 세수 의식을 하고, 자꾸만 빨아먹는 손도 닦아주고, 온몸을 가볍게 마사지해주어야지. 아, 아기 먹이기 전에 수유의자랑 소파에 먼지도 돌돌이로 청소해 놓아야겠다. 밥도 안쳐야 하고. 아기를 먹이고 나면 청소기도 돌려야 하고, 창문 열어 환기도 시켜야 한다. 아기 깨자마자 밥을 안쳐야겠네. 아, 아까 얘기했나? 그러고 나면 나도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도 하고, 쌓여있는 그릇들 정리도 하고.... 밤에 돌려놓은 아기 빨래를 건조기에서 꺼내 개고, 수납해야 한다. 아, 아까 얘기했나? 그런 후에는 아기랑 놀아줘야 해. 게다가 오늘은 또 손님이 오신다...
하찮은, 너무나 하찮은, 그러나 너무나 수고로운
이런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짜증이 솟구친다. 도처에 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 일들은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내가 무엇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것들이다. 기저귀 S 박스를 열기 위해 포장 테이핑을 잡아 뜯는 것만도 힘겹게 느껴졌다. 뜯어놓은 M 사이즈 기저귀는 한 달 후에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시 박스에 넣어놓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작업방에 쌓여있는 네 개의 큰 박스를 들어 차례로 내려놓았다가 꺼냈던 자리에 집어넣고 다시 박스를 쌓아 올려야 한다. 아아, 이 하찮은 수고로움!
어제, 아기 낳은 이후로 처음 방문했던 아빠와 오빠와 새언니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차려주는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도 돕지 않고 갔다. 말 그대로 정말 대접해야 하는 "손님"이었다. 밥을 차리는 일을 남편이 했으니 아마도 속으로 아, 이 집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주네~" 대단해. 멋진 남편이야, 복 받은 아내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온갖 자잘한 이런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남편은 내가 집안일을 더 잘하라고 요구했을 때, 회사 여직원들은 아기 키우는 일과 집안일을 모두 그들이 다 했다며 "나 같은 남편은 별로 없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했기 때문일까. 이 정도 하는 것도 감사하라는 뜻일까? 고마워해야 하나?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걸 "도와줘"서...? 육아와 살림이 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 된 거지? 내 몸으로 아기를 낳아서? 여자라서? 엄마니까? 하지만 임신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남편과 의논 후에, 동의 후에, 협업해서 했다. 그런데 임신부터 출산, 육아까지 이 모든 일들의 책임자는 어느새 내가 되어있는 것이 왜일까.
양육자로서 엄마가 아기와 애착을 만들고 생후 초기 가장 중요한 때에 그 발달을 적극적으로 촉진해 나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또한 아마도 내가 남편보다 섬세하고 꼼꼼하고,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이고 소통을 잘하기 때문에 아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맡아 키우는 주 양육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다. 하지만 집안일은 다르잖아. 나도 직장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출산 일주일 전까지 출근을 했다. 출산전후휴가를 3개월 쓸 때까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고 이제는 육아 휴직에 들어가 있다. 육아휴직 중에도 급여의 일부분은 나온다. 부모급여라는 명목의 지원금도 받고 있다. 임신 중에는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 돈이 들어갈 일이 너무 많아 투잡을 뛰었다. 마침 이전에 하던 편집 디자인 일이 들어와서 회사에서 퇴근하고 난 뒤 저녁이나 주말에 디자인 일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결혼 10년 만에 새 냉장고를 샀고, 건조기를 샀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자 왜 갑자기 내가 가정주부가 된 거지? 알 수 없다. 갑자기 떠맡게 된 나의 역할과 할 일 목록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진다.
여자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그런 일을 도맡아서 책임지게끔 이미 "설정"되어 있는 존재일까.
갑자기 나 자신이 작아진 느낌이 든다. 참담하기도 하다. 내가 선택한 출산과 육아인데, 주체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잠재력과 능력은 아직 무궁무진하고, 내 안에 남아있고, 밖으로 꺼내 쓸 수 있는데, 출산과 육아라는 엄청 고되고 기쁜 일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게끔 환경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도 나에게 그걸 기대하고 바라는 눈치인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어제 방문한 아빠는 가족들이 부대껴서 밥을 안 먹는 나를 보고(같은 식탁에서 먹으면 체할 것 같았다) "아기 젖 주려면 잘 먹어야 하는데"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은 대신. 아아, 갑자기 엄마가 된 존재는 엄마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거구나. 엄마라는 도구. 엄마라는 역할. 아마도, 아빠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어디가 아픈지, 괜찮은지를 묻는 대신 "엄마니까 강해져야지. 아프면 안 된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고 챙겼던 분은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물론 아기를 너무나 예뻐하셨지만, 간간이 내 근황도 물어봐주셨고, 모유수유를 힘들어하는 내게 "네가 제일 중요해. 힘들면 그냥 끊어버려."라고 하셨다. 그 마음. 먼저 자식을 생각하는 친정어머니 같은 그 마음. 그 마음이 위안이 되어 오히려 "시댁"같은 아빠와 오빠의 존재를 이겨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 나에게 따스한 시어머니가 있고, 나를 평가하고 강인해지라고 말하는 아빠가 있구나. 나에게 시어머니는 그런 존재구나, 나에게 친아버지와 친오빠는 그런 존재구나.
원가족이 방문하고 난 뒤 여파는 며칠을 갔다. 그날, 내 안에서 강렬하게 솟아오르던 분노는 뭐였을까. 그냥 그런 사람들이고,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사람들인데.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들인데,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아빠는 재작년 파산 신청을 한 뒤로 지금은 딱히 직업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되풀이해온 각종 사업실패와 투자의 끝은 결국 파산이었다. 그런데, 어제 우리 집에 와서는 아직도 코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내년쯤에는 돈을 왕창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이제는 지겨운 그 말도 잊지 않았다.
무엇을 기대했기에 그렇게 강렬한 분노가 솟아올랐을까. 아마도.. 내가 아이를 낳고 이만큼 변화했으니 그에 맞춰 가족들도 변화되어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파산까지 겪은 아버지가 이제는 철이 들었길, 겸손해져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나의 프레임이 무너져야 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분노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갖고 싶었던 다정한 가족. 소통하는 가족. 챙기는 가족. 내가 받고 싶었던 내리사랑, 성숙해진 아버지를 포기해야 함을 느꼈기에 받아들이기에 앞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 지도 모른다. 모든 애도 작업의 시작은 분노이다.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그걸 상실했음을 인정할 수 없어!" 그런 강렬했던 분노는 밤새 꿈으로 나타났고 새벽 수유 때는 깊은 생각과 비통함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보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반복됐던 허황된 약속은 매번 지켜지지 않았고, 집에서는 컴퓨터나 휴대폰, TV 만 들여다보고 있던 아빠. 어째서 지금은 바뀌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심리학과 상담 공부를 시작했고 이제는 상담심리사로 일까지 하고 있는 내가 이렇게까지 많이 바뀌었으니 가족들도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내가 가장 어리석었구나!
복종과 의지 사이
나의 아기는 이제 배밀이를 시작했다.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놓으면 아직도 4분 후에 낑낑대지만 목을 곧잘 가눈다. 팔과 다리를 아주아주 많이 움직인다. 팔로는 모빌에 매달린 인형을 팡팡 치고, 다리로는 맘마 먹고 난 뒤 발아래 있는 쿠션을 팡팡 친다. 이제 손가락으로는 가제 손수건이나 얇은 것들을 움켜쥘 수 있게 됐다. 그런 아기를 바라보면서, 신체 발달을 계속하고 있는 이 아기라는 존재는 새로운 발달에 대한 "의지"만이 가득한 상태라는 걸 깨닫는다. 아기의 온몸은 의지의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 "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할 테야", "이렇게 할 테야", "하겠어!!"
꽉 움켜쥔 두 주먹과 자고 일어날 때면 몇 번이고 쭉쭉 켜는 기지개, 의지로 가득한 목소리(옹알이),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허벅지가 가장 두껍고 포동포동하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엄청난 기세로 바둥거리는 두 다리, 겨드랑이를 잘 잡아주면 힘을 그 작은 포인트에 모두 실은 채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엄지발가락까지. 이 0세 아가의 온몸은 생에 대한, 발달에 대한 강한 의지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20대 때까지 그러하였다. 그 의지로 이루어낸 일들도 많았다. 하지만 의지와 비례해서 커지는 분노도 있었다. 내 의지는 충만한데, 꼭 그렇게 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지 않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잠재력 밖에는 없던 빈 두 손이 삼십 대 초중반부터 하나둘 씩 무언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남편, 결혼, 차, 경력, 경험, 포트폴리오, 자격증, 집, 그리고 이제는 소중한 내 아기까지... 내가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이전에는 없던 불안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룩한 것을 잃게 될까 봐, 이렇게 얻은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까 봐, 아마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이루어 낸 민주주의를 잃게 될 까봐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겪은 최근의 트라우마처럼.
반대로 의지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시작했다. 나의 의지 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 포기하지 못했고, 그래서 겪어야 했던 이상과 현실과의 간극. 괴리는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중에는 원가족에 대한 것도 강하게 들어 있었구나.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나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똑바로 보지 않고 있었구나. 그냥 그런 분이라는 걸, 더 이상을 기대해도 그걸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힘들었구나. 아직도 아빠의 말을 믿고 싶었나 보다. 멋지고 자랑하고 싶은 아버지를 놓지 못하고 있었던 나 역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구나.
그것은 포기였다
바닥에 엎드려 뺨을 대고 바닥의 온기를 느껴보았다. 팔다리를 천천히 허둥대면서 나의 온몸에 들어있던 의지를 모두 빼 보았다. 편안했다. 어떻게 하려는 의지 없이 그냥 바닥에 내맡기는 느낌은. 그러다 갑자기 내 아기처럼 의지를 내 보았다. 두 팔에 힘을 주어 가슴팍을 밀어내고 머리를 들어 올리려 버둥버둥거렸다. 아직은 아기가 하지 못하는 동작들, 그렇지만 그걸 해내기 위한 계속되는 버둥거림, 고군분투. 나는 어떤 상태인가. 나는 아직도 분투하고 있는가? 다시, 힘을 빼 보았다. 어떠한 의지도 내지 않고 바닥에 모든 걸 맡기는 일은 참 편안했다. 힘을 빼는 것. 의지를 접는 것.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가족을 포함해 모든 존재들이 지금 그렇게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 복종. 복종을 위해서는 포기가 필요했다.
나의 아기는 의지를 내야 한다. 삶에 대한 의지를. 앞으로 더 발달하고 성장하기 위해 이 아이가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러하였듯. 아기의 의지를 응원한다. 그 통과의례들을 잘 치러낼 수 있도록, 좌절하더라도 다시 힘낼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싶다. 하지만 그걸 직접 겪어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이 아이겠지. 아기는 내 안에서 나왔지만 나와 다른 타인이니 말이다.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반면에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포기를. 이만큼 살아왔고, 강한 의지로 많은 것을 얻어냈다. 아마도 앞으로도 많은 도전을 할 테지만, 이제는 잘 구분해야 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정확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복종할 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아마 때가 살짝 지났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습해야 한다. 그 비중은 부모에 대한 것에서 이제는 아이에 대한 것으로 서서히, 점점 더 크게 바뀌겠지. 응원하고 지지하되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할 일이 앞으로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떨까? 내가 기대했던 대상들읕 주로 타인들이었구나. 그 기대를 나에게 돌리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아직도 바란다, 내가 성장하기를, 더 성숙해져 가기를. 그러하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이와 함께 더 영글어가기를 나는 포기하지 않으련다. 연습해야겠다. 행복하게 포기하는 법을, 그리고 행복하게 의지를 내는 법을.
이제 며칠 후면 겨울의 끝이라는 대한이고, 설이다. 대한은 일년의 마지막 절기이다. 한 해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과 닿아 있는, 매듭 지어야할 것들을 매듭지어야할 시기다. 매듭을 짓는 다는 것은 솔기의 끝을 잘라 내야 할 것은 잘라내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서 마감하고 다듬는 것이다. 이제 설 연휴까지 일주일 남짓 남았다. 그 시간이 나의 마음 속에 것들을 매듭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를.
덧붙이기:
처음에 언급했던 온갖 해야할 집안일들을 잠시 포기했다. 저 멀리 파주에서 벗이 오기로 한 토요일이었는데, 청소도 정돈도 하지 않은 채 토요일 출근인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아기를 안고 그냥 소파에 앉아 쉬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친구는 집에 알아서 찾아왔고, 남편은 퇴근했다. 그리고 집안일을 포기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