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은 해체의 과정이다

아기 키우기 +D 126

by 마음의 안쪽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것들이 생겨났다




얼마 전, 밤중 수유를 마치고 나서였나.. 어스름한 빛 속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친구 "문OO"이 떠올랐다(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평소에 너무 자연스럽게 "문OO, 문OO" 하던 친구의 성이 갑자기 낯설게 전혀 새롭게 느껴졌다. '문? Moon!?' 성이 문이라고? 주변에 문 씨가 얼마나 있었지? 헤아려보니 지인 중에 문 씨는 방금 떠오른 이 친구 "문주O"과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에서 각각 여기장, 남기장을 맡았던 "문승O", "문선O" 이렇게 딱 세명이었다. 유명인 중에는 누가 있지? "문익환?" 아, "문익점"~ 그리고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문"이라는 성이 세상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특별한 성을 지금까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기를 키우면서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다. 완전히 자연스러워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던 많은 것들이 전혀 낯선, 생경한, 새로운 느낌으로 확 다가오곤 한다. 이런 현상은 건망증과도 연결된다. 바로 어제 했던 일이, 아니 바로 직전에 물건을 어딘가 놔두었던 장소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남편한테 무슨 말을 했다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임신 전, 아니 출산 전까지도 기억력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고, 10년 전에 있었던 일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두어 번 본 사람이 했던 말, 친한 모임 사람들의 사주일간(사주팔자 중의 가장 기둥이 되는 부분), 그 어느 순간 그 누가 입었던 옷 색깔까지 기억하는 편이라 내 기억창고는 언제나 풀(full)로 잔여석 없이 가득가득 차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예전에 엄마가 가끔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 남편이 내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화가 났었다. 아니 왜 기억을 못 해!?...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제 내가 했던 말이나 방금 전에 적어 놓은 메모를 어디에 두었는지 조차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아니, 메모를 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누구보다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던 내가 이런 망각의 늪에 빠지다니!! 너무 달라진 건망증 환자인 내가 놀랍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현상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망각하는 삶은 모든 게 새로운 느낌--다시 말하면 고정관념이 없이 리셋되어 버린--으로 나를 안내했기 때문이다.




내 삶을 지탱해 왔던 기억들



사람들은 대개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다르게 말해 고정관념은 우리가 일상을 살게 하는 베이스캠프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추운 한겨울에 "겨울에 밖에 나갈 때는 외투를 입고 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기억, 즉 고정관념이 없다면 매 순간 우리는 낯설고 힘든 환경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아기는 아직 기억을 관활하는 뇌의 영역인 해마가 발달되지 않아, 고정관념이 없는 상태이다. 아기는 1초 전에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다가, 욕구가 충족되거나 신경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 1초 만에 활짝 웃을 수 있는 존재이다. 아기는 아직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아직 병뚜껑을 열지도 못한다. 오늘로 127일 째인 나의 아기가 할 수 있게 된 일은, 엎드려서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일, 엄마 아빠에게 안긴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일, 두 손을 사용해서 간신히 치발기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일이다. 그것도 아기에겐 엄청난 발전이며, 엄청난 시행착오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리라. 고정관념이 없는 아기는 아직 낯을 가리지도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준다(우리 아기는 잘 웃는다, 정말 잘 웃는다! 엄마 닮아서... 아마도 아직 성격으로 발달되기 이전의 "기질"만이 발현되는 시기일 수 있는데, 기질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위험회피가 낮은가 보다고 생각해 본다). 아기를 키우면서, 나도 아기처럼 되어가고 있다.




고정관념의 해체: 망각



나의 생활을 지탱하고 구성했던 수많은 고정관념들이 해체되는 느낌. 이 생경한 느낌은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 씻고 저녁에 자기 전에 양치를 하는 일조차 낯설게 느껴지게 한다. 아마도 나의 많은 에너지가 새로운 존재인 아기를 향해 있어, 꼭 필요하지 않은 기억들은 저장하지 않고 지워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전에는 아기를 낳은 엄마들이 흔히 겪는다는 건망증(냄비에 물 올려놓고 잊거나, 다림질하다가 전화가 울리면 다리미를 받으려 한다던가)을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여겼다. 그런데 나의 현실이 되고 나니 사뭇 신기하고 어찌 보면 짠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 건망증이 계속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괜찮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상식마저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기고 나면 그렇게 해체된 고정관념이 한편으로는 나의 기억과 상처들과 인간관계를 해체시켜 전혀 새롭게 쌓아 올릴 수 있는 토대가 될 거라는 기대감도 생긴다.




출산은 해체의 과정이다



몸의 해체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은 나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비단 기억에 관해서만이 아니다. 애초에 자연분만을 하는 엄마의 온몸은 아기를 몸에서 꺼내기 위해 모든 뼈가 느슨해져 그 연결고리가 해체되었다가 100일 여 동안 천천히 재구성되는데, 그래서 산후조리가 중요하다. 산후조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전의 습관을 벗어던진 새롭게 건강한 몸이 되느냐, 아니면 이전보다 더 약해지고 생기를 잃은 몸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나보다 먼저 출산을 한 연예인 몇 명이 떠오른다. 대개 출산을 거치고 복귀한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 확 늙어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이전보다 성숙한 느낌인 채로 훨씬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었다. 할리우드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출산 후 대중 앞에 다시 섰을 때, 그녀의 트레이드 마트였던 이전의 그 젖살과 풍만함이 사라져 있고 웨이브진 풍성한 머릿결 역시 온 데 간데없는 짧은 커트 머리였지만 나는 그녀가 늙었다는 느낌보다는 "성숙해졌다, 달라졌다,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목격하였을 뿐인 그녀의 외적인 모습 안에는 "엄마노릇"에 대한 자부심과 헌신이 들어있다고 느꼈다(진실은 알 수 없지만). 짧게 친 커트머리는 아기를 돌보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을 아끼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했었다.



나 역시 출산 후 몸의 느낌을 완전히 잃어 내 몸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고, 나 자신이 없어진 것만 같고, 통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잘 알 수 없고, 다들 출산 후에는 뼈가 벌어졌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질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온몸이 통째로 고무 덩어리 같아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출산 후 몇 주 뒤 스리슬쩍 시험 삼아 요가를 해 본 날이 있었는데, 임신 이전에는 내 체형상 잘 되지 않던 특정한 요가 동작이 스르르 되는 걸 보고 놀랐다(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무리하고 있더라도 스스로가 모를 수 있다). 모유수유 역시 몸의 해체였다. 출산 전까지는 몸에 달라붙어 있는 덜렁거리는 불편하고 무거운, 관상용 가슴이었다. 나는 여성성에 대한 생각을 별로 안 하고 사는 사람이어서 가슴은 그냥 다소 귀찮은 존재, 달리기 할 때 방해가 되는 존재 정도였다. 하지만 출산 후 가슴은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 하루아침에 바빠졌고, 매우 중대한 신체 기관이 되어버렸다. 아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갑자기 시동을 건, 차고 속의 자동차가 되었다. 아기를 위해 마사지를 하고 아기를 위해 모유수유 공부를 하고... 관리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해진 몸의 일부로 등극했다. 언젠가 이 기능을 다하고 나면 가슴은 예전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의 가슴은 아니게 될 것이다. 단지 수유로 인해 쪼그라들고 모양이 변해 쳐지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슴은 모유수유라는 위대한 여정을 "경험"한, 전혀 새로운 가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산 후의 몸은 나쁘게 말하면 가혹한 나이 듦으로의 한 발을 딛게 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나라는 존재의 해체와 새로운 재구성을 겪게 된다.




정체성의 해체


오늘도 새벽 수유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시 그 느낌을 음미해 보았다. 이전에는 "나"를 떠올렸을 때, 오로지 나 하나만 느끼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런데 오늘 느껴본 "나"의 곁에는 다른 존재가 붙어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둘이 된 듯한 느낌. 아니, "나"의 일부가 조금 떨어져 나와서 옆에 서 있고, 그래서 나의 전체는 확장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옆의 존재는 분명한 타인. 나는 그 타인이 타"인(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성장하고 발달하는 데 나의 모든 걸 줄 수 있는 느낌인 것이다.

내가 갖고있던 정체성들은 어땠을까. 이전에는 "나"라는 커다란 대표적 자아 안에 '인간', '여성', '상담자', '글 쓰는 이', '만화 그리는 이', '디자이너' 등이 들어있었고 미약하게 '아내'라는 정체성도 존재했다(남편한테 왠지 미안하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는 커다란 정체성 옆에 그에 버금가는 커다란 새로운 정체성이 서 있는 느낌이다. 이전의 정체성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나름 갖게 되었던 위계질서가 해체되었다. 다른 정체성들은 따까리처럼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새로운 자아, "엄마"라는 정체성이 생긴 것이다.

엄마라는 모습을 한 나는 아기에게 내 모든 걸 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랑일 것이지만, 희생이나 헌신은 아니다. 주어도, 또 주어도 나의 원래 자원이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것마저 함께 커지는 느낌이므로 희생일 수 없고, 아까울 리가 만무하다. 모든 엄마의 사랑은 단지 희생이나 헌신이 아니다. 자신을 갈아 넣어 없애버리는 성격의 줌은 그럴만한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아기와 엄마 모두에게 좋지 않다. 건강한 줌은 줄수록 채워진다. 그렇기에 주고, 또 줄 수 있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내가 커지는 그 행위는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나 역시 출산 이후 나의 숨어있던 시간을 길게 늘려서 쓰거나 숨어있던 내 잠재력의 일부를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출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해내게 되었다. 출산은 놀라운 경험이다, 성장하고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의 해체


세상 역시 더 이상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기를 낳은 지 20일쯤 되던 날, 산후 도우미 찬스로 혼자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자동차 엔진오일을 갈라는 표시증이 켜져 겸사겸사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정말 오래간만에 태양광을 쐬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들의 발랄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끌리듯 향한 그곳에는 언덕 아래 위치한 어린이집이 있었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까르르하고 각종 소리를 내며 놀고 있었다. 그 순간 느꼈다. 나의 시선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것이 절대 될 수 없음을. 모든 것을 보는 나의 눈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냥 일부의 시각이 변화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물질이 들어가 성질 자체가 변화해 버린 화학용제처럼. 나는 세계관이 바뀌어 있었다. 20대 때 혹사 당했지만 대신 엄청난 하드워킹으로 나의 편집디자인 실력을 월등히 향상시켰던 회사에 다닐 적에, 그 실장의 아들이 ADHD라고 하며 히말라야로 떠나는 회사 워크숍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5살짜리 아이를 나와 동료는 얼굴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내가 아닌 아이와 그 아빠(실장)를 두둔했을 때,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어버렸다. 아, 얼마나 힘들었을까. 단지 나의 세상에 작은 아이 하나가 더해졌을 뿐인데, 이토록 근원적인 나라는 사람의 성질이 변화해 버리다니.




새로 태어난 느낌


출산 이전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웨이브 진 머리가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얼굴은 핼쑥해져 있으며, 머리숱은 많다. 배가 앞으로 앞으로 로케트처럼 나와 있다. 임신 막바지까지 출근을 하고 출장을 다니며,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지출(?)을 준비하느라 투잡을 뛰었던 의지의 아이콘 같은 나(그게 좋은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짧게 치고, 배가 홀쭉해졌으며, 모유수유를 하기 위해 임신 때보다 더 밥을 잘 챙겨 먹는. 하루종인 아기와 함께 집에만 머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

이전의 내가 이야기한다. "넌 전혀 새로워졌구나. 더 이상 내가 아니구나" 지금의 내가 이야기한다. "응, 맞아. 아기가 내 안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너는 죽었지. 좋은 의미에서야.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 자신은 너를 벗고 새로 태어났어. 그리고, 그런 내가 놀랍고, 신비하고, 그리고 행복해. 지금 이 순간은 쏜 살같이 지나가고 있어. 나는 아기가 태어난 이후, 그 순간이 너무 소중해 그리워했고, 순간을 붙잡고 싶어 쉴 새 없이 일기를 쓰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어. 그래도 붙잡지 못하더라. 오늘은 몸을 뒤집으려 수 차례 끙끙 애를 쓰는 아기 옆에 가만히 누워 같이 아기가 쉬는 시간을 가질 때마다 눈발이 날리는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어. 그 소중한 순간. 순간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아기와 함께 그저 존재하고 마음껏, 내가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어."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경험들과 인연들. 안녕!, 그리고 새롭게 안녕?


나는 아기와 함께 새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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