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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l 19. 2019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모든 이의 해방을 위하여

여성주의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





여성주의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





0. 여성주의는 체제의 전복과 여성의 우월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수만년 간 이어져 온 성차별적 관념으로부터 남녀를 아우른 모든 인간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임을 명시하는 영화다. 그릇된 시선으로 페미니즘을 폄하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작품이랄까.



0. 여성주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여성이 여성운동을 통해 사회를 지탱해 온 전통적 체제를 전복하고 여성이 우월할 권리를 쟁취하려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여성주의는 성차별적 관념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을 넘어서서, 결국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여성주의는 특정한 성性의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할 권리를 찾으려는 목소리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타파하면 과연 여성들만 이익을 보는 사회가 될까? 아니다. 생득적 속성인 성에 기반한 차별을 타파함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 또한 이른바 '남성성'이라는 특수성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강인하고 굳세고 억세야 하는 남성성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남성들의 약함도 존중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분홍색을 좋아하고 머리카락을 기르고 감수성 넘치는 취향에 바깥 노동보다는 집안일에 특화된 성향을 가진 남성이라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규정된 선천적 자질을 따르지 않는 남성이라도 사회에서 환영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개개인의 특성과 선호에 따라 행동하고 그 행동을 존증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결코, 여성들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남성들의 밥그릇을 반으로 나누고 엎음으로써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뿌리뽑겠다는 운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루스 긴즈버그가 변호한 항소심이 증명하고 있다. 루스 긴즈버그는 그 항소심을 통해 법 앞에서,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인식 앞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존재로서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여성주의가 담고 있는 깊고도 최종적인 함의다.



0. 루스 긴즈버그는 결국 (영화에서 다뤄진 항소심에 한정해서) 사회구성원에 대한 법의 성차별적 인식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다. 다만 이것은 법리와 논리와 싸움이니 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지, 사회의 인식 자체를 바꾸는 싸움이었다면 어림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무엇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한 번 공고해지면 그것은 깨부술 수 없는 벽이 된다. 논리는 계산적일 수 있지만 인간의 인식은 그렇지 않은, 전혀 다른 속성으로 작동하는 것이므로.



0. 영화의 어느 부분에선가 루스 긴즈버그는, 딸에게 '이 모든 건 너를 위한 거야' 라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나의 평안과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 그리고 이어질 또 다음의 세대를 위한 것임을 천명하는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나 또한 지금 내는 이 목소리가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와 우리 세대에 한정된 목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차별의 철폐와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주장하는 내 모든 인식과 발화와 행동은 내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고, 그렇기에 나 또한 세간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에 쉽게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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