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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l 19. 2019

영화 <기생충>,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었다.

그 '계획된 무계획'에 대하여.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었다.
그 계획된 무계획에 대하여.






0. 세찬 물살 사이로 우뚝 선 아들의 두 발. 휩쓸려갈듯 물에 거의 잠긴 자신의 발을 바라보며, 아들은 제 인생을 읽어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상적인 시선도 잠시, 그는 방금 전까지 가짜 주인 행세를 했던 가짜 집에서 쫓겨난 뒤 곧 진짜 집에서도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온 동네를 휩쓸고 온 물줄기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반지하를 덮칠 때, 필사적으로 물길을 헤치며 그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생각한다.



0.그 밤, 누군가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한 집을 아등바등 떠나고, 누군가는 안전한 집으로 느긋하게 돌아왔다. 모두에게 같은 비가 내렸음에도.



0. 수재민 임시대피소의 바닥에 무기력하게 누워, '계획된 무계획'을 역설하며 팔로 두 눈을 가리던 아버지의 모습. 무계획을 계획했지만, 무계획마저도 결국은 무계획이라는 계획이 필요했던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듯 계획이란 언제나 꼬이고 무너지기 마련이어서, 그 연유로 그들은 어느 이름 모를 학교의 강당 바닥에까지 떠밀려왔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들에게는 넓은 집과 따뜻한 침실과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과 탐스러운 음식과 흡만한 여유라는 쿠션과 에어백이 없었으므로, 계획의 모든 어그러짐은 유일하게 가진 몸으로 오롯이 막아내야 했다. 좁고 더럽고 물이 차오르고 당장의 끼니를 근심하며 동동거리는 삶에는 방패랄 것이 없었다. 그나마 하나 남은 방어막이 있다면, 오랫동안 견뎌온 지리한 가난으로 인해 그러한 풍파를 맞아도 '그러려니' 하는, 당연한 시련이려니 여길 수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그 방어막의 이름은 그럴듯한 표현으로는 '초연함', 현실적인 표현으로는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0. 그러나. 아버지의 인생에 단 하나 성공한 '계획된 무계획'이 있으니, 그것은 지하에 숨어들어 그 집에 살지만 살지 않는 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성공했다. 성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차용할 수 있다면.



0. 모든 일을 겪어낸 아들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었다. 생계와 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그 사람이 나아갈 길을 규정했다. 이만 지쳐 투항할 겨를도 없이 궁상에 끌려가는 삶. 그럴 수 밖에 없는 삶.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그럼에도 산다는 것. '그럼에도'라는 말이 가지는 함의를 생각한다.


양지 바른 집의 그늘진 지하실에 스스로를 가둔 아버지를 꺼내줄 날을 기다리는 아들. 그 비상식적인 삶의 형태 앞에서 「이사하는 날 엄마와 저는 정원에 있을테니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이라고 태연하게 인사를 올리는 아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감옥에서 건너편 아버지의 감옥을 향해 손을 뻗어보는 아들. '그럼에도'라는 말이 가진 함의를 역설하는 삶 그 자체인 그들의 인생.



0. 아버지는 그 집의 바깥으로, 햇볕을 향해 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가 아는 이런 이야기들의 거의 모든 결말이 그렇듯, 그는 영영 나올 수 없었을 테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의 의지를 짐작해 보아야 한다. 아마 그는 나올 수 있는, 그 집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집에, 지하에 숨어든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성공한 계획된 무계획이었으므로. 또한, 적어도 그 집에서는 지하실을 가득 채운 본래의 퀴퀴한 냄새 뒤에 숨어 지하철과 무말랭이의 냄새를 모른 척 할 수 있었을 테니까.



0. 영화가 끝났다. 발바닥에 쩍쩍 눌어붙는 한여름 불볕더위의 누런 장판 같이, 끈덕지게 엉기는 진한 쓴맛을 어찌 떼어놓을 지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센서등이 탁, 하고 켜졌다. 가만히 서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혹시나 이어질 지도 모를 깜빡임을 기다렸다.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제 시간,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소등된 등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집은 아직은, 오롯이 나의 집인 모양이었다.


나의 집.

홈, 스위트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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