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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ul 24. 2019

영화 <칠드런 액트>, 이제 그는 자유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이후 찾아온 허무에서 길을 잃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이후 찾아온 허무에서 길을 잃다.





이미 무너져가는 존엄성보다 당장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판결로써 애덤 헨리는 새생명을 얻는다. 실체가 증명되지 않은 종교의 자유에 입각해 내려진 비합리적 결정보다는, 그에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앞으로 다가올 삶과 사랑과 같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를 취득할 권리를 존중한 판결이었다.



애덤 헨리는 살았다. 타인의 피를 수혈받아 살아남으로써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의 교리를 배반한 셈이 되었지만, 그는 더럽혀진 영혼이 아닌 어렵게 살아돌아온 끔찍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 부모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는 건강한 청년의 몸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판사 피오나 메이가 그의 삶에 다가올 것이라 말했던 삶이랄게, 사랑이랄게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 돌아온 애덤 헨리. 그러나 그 경계 너머의 삶엔 그가 있을 거라 짐작했던 무엇이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판결 전 대상자의 상태를 보기 위해 이례적으로 애덤의 병실을 찾은 판사 피오나. 그녀와 함께 오래된 기타줄을 퉁기며 불렀던 The Salley Gardens. 애덤은 적막한 병실을 잔잔하게 메웠던 그 고운 멜로디에서 삶에의 한 자락 욕망을 느꼈다. 살아난다면, 이 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같은 멋진 경험이 삶을 가득 채울 것만 같았다. 그는 그 믿음으로 기꺼이 타인의 피를 받아들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 믿음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침대맡에서의 꿈같은 작은 노래, 그런 일은 삶에 있어 아주아주 가끔 일어나곤 하는 일일 뿐인데 마치 그것이 전부일 것만 같았던 바람이 모두 착각이었음을. 현실의 삶에는 작디작은 환희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작은 기쁨이 아주 간혹 있을 뿐이라는 걸, 머릿 속에서 불꽃처럼 터지곤 하는 진귀한 생각의 발현도 쉽게 찾아오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었다. 세상은 결코 그가 바랐던 대로의 삶을 선사해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애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세상이 뒤집힌 기분이었으리라. 허탈과 허무와 자괴감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한 끝에 완전히 잠식해버리는 일은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껏 돌아와서,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은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 고민했을 테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저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이 허무를 어떻게 이겨내는지 죽도록 궁금했을 것이다. 기쁨과 희망과 희열도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반복되는 무료한 삶을, 고민과 상념에 대한 갖가지 탐구도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왜 저 자신은 그들처럼 이 삶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지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이번에는 그가 믿은 종교적 교리의 실천이 아니라, 죽음의 경계 이후 찾아온 허무한 삶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원해서였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깨어있으므로 얻어야만 하는 모든 괴로움에 작별을 고했다. 이제 그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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