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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Aug 22. 2019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헛헛한 일상의 고요를 박차고 새롭고 유쾌한 삶에 흠뻑 젖기 위하여.






나는 재미없어 보이지만 정말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던 나는 시간을 쪼개고 품을 들이고 돈을 써서 그것들을 좇았다. 평일 밤은 극장에서 영화를, 새벽녘엔 스탠드를 켜 둔 고요한 방에서 책을, 주말 낮엔 전시를, 주말 밤엔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하는 생생한 즐거움을 누렸다. 락밴드 등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콘서트의 '진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탠딩이라며, 주위의 팬들을 동지삼아 뛰고 환호하며 가사를 따라 부르고, 두 팔을 들고 휘저으며 가슴을 쿵쿵 울리는 사운드에 몸을 날리는 일은 손에 꼽는 즐거움이었다.



비가 내려 진창이 된 락 페스티벌에서 흠뻑 젖은 채 밴드 'Fun.'의 보컬 네이트 루스를 보고, 그 다음다음 해 같은 날의 홍대에서 다시 그의 내한 공연을 찾고, 다시 몇 개월 뒤 이번엔 강변에서 관객 대신 그가 주도하는 '반반 떼창'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등 네이트의 내한 공연에 모두 출석도장을 찍은 건 내 자랑 아닌 자랑이었다. 안온한 일상 속에서 새롭고 유쾌한 즐거움을 발굴하겠다고 찾은 공연에서 멋쩍음으로 한 발 물러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그 순간들을 즐겼다. 책이든 영화든 공연이든, 그 모든 것에서 추려내고 찾아낸 나만의 감정을 누리며 활기찬 기쁨에 흠뻑 젖어들곤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것이 많은 만큼, 그것들에 내가 쏟을 수 있는 만큼의 모든 관심을 쏟고 그 집중을 즐거이 여길 줄 알았던 사람.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떤가. 영화와 책과 연극과 뮤지컬과 콘서트로부터 모두 멀어진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현실적인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나이는 먹어가는데 언제까지고 이렇게 철없이 살 수는 없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들을 접어둔 이후 나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담고 있는가. 진정으로 재미없는 사람이 된 나의 모습은… ….



현실적인 삶을 고민하던 얼마간이었다. 사람들이니 모임이니, 책이니 영화니, 공연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모두 뜬구름일 뿐, 그 화려한 장막 너머의 '진짜 내 삶'은 내가 이렇게 즐거운 사이 되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있는 힘껏 취향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온 뒤 당면하는 일들은 너무나도 현실, 현실 그 자체였다. 미래의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고, 결혼을 고민해야 하고, 아직 닥치지도 않은 출산과 육아를 근심하는 동시에 당장 살아남기 위해 때늦은 공부를 고민하는 그저 그런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남들은 다 그렇게들 감내하며 산다는 삶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눈앞에서 버티고 떠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놀러만 다닐 거니?' 하는 주위의 혀를 차는 시선은 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사는 걸까?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적당히 돈벌이를 하다가, 적당한 사람을 만나 적당한 때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적당히 하나둘 낳아 키우고, 적당한 돈을 대출받아 적당히 갚고 쓰며 내 집 마련을 하고… 그렇게 적당한, '타협으로 점철된 어른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안온한 일상과 새로운 즐거움 사이에서 타협했을까?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포기하고 체념했지? 정말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욕심과 욕망을 접어둘 수 있었을까?



고민을 아무리 해봐도 답이 없었다.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철이 없다고 하는, 이 즐거움에 대한 욕심을 아무리 파헤쳐 봐도 어떤 타협점이나 절충점을 찾을 수 없었다. 평행선이었다. 도대체 결혼이니 육아니 하는 것들이 다 뭔가. 진정한 어른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에도 다 때가 있다고, 남들 할 때 하고 키울 때 키우라는 말들에는 정말 '어쩌라고요?'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다종 다양한 고민들로 인해 괴로운 나날이었다.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고, 한낮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면 시쳇말로 '멍 때리기' 일쑤였다. 온갖 상념들이 마음속에 사무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택한 대안은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이 환희와 기쁨을 제쳐둘 수 없어 평범한 삶의 단계를 무의식 중에 밀어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방해물을 인위적으로라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나도 보통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가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고릿적부터 뼈에 새기도록 들어왔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책도 영화도 줄이고, 전시와 공연도 줄였다. 마음이 동할 계기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역효과였다. 일상에 재미와 열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날들이 이어졌고, 1초 1분이 정직하게 흘러갔다. 꿈같은 10분, 감동적인 1시간 같은 시간의 가치는 더 이상 잴 수 없었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만이 일상에 주어진 유일한 변화나 다름없었다. '남들 다 그렇게 사는 삶'에 방해물이 될 것 같은 일상을 덜어내자 평범한 삶마저도 사라진 것 같은 진공이 그 자리를 메웠다. 거품을 걷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득 찬 알맹이를 마구 퍼낸 셈이었다. 허탈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 게 아니라, 아예 다리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가 분명한 선택이기는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방향이 삐끗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문어발을 놓듯 좋아하는 일들 여기저기에 기웃대며 열광하는 것이 꼭 철없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은 아닐 텐데. 내 삶에 대한 나의 뚝심을 믿기보다, 세간의 시선에 지레 겁먹고 화들짝 놀라 물러섰던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탄식했다. 다종 다양한 취향으로 부지런히 채운 용광로에 찬물을 끼얹어 완전히 식히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을 텐데 섣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세간의 잣대에 키를 맞추려다 보니 즐거움을 잃었고 취향은 뭉그러졌으며 일상의 재미는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허전함과 공허를 겪고 나서야, 중요한 건 남들 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인 내가 얼마나 큰 즐거움을 느끼는가였음을 깨달았다. 값비싸다면 값비싼 배움이다.



과거의 나는 그토록 즐거운 가운데 살면서도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나름 재미있게 살았던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삶을 다시 찾고 싶다. 세상이 나의 철없음을 어떤 방식으로 재단하든 말든, 나는 내 기쁨을 찾아 열광하고 싶다. 나는 다시 뛰고 싶다. 손은 하늘로 치켜들고 발은 바닥을 박차고 올라 방방 뛰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낯선 이들과 함께 하나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동지애에 젖어 열광하고 싶다. 이 헛헛한 일상의 고요를 박차고 다시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티켓 판매 사이트에 접속해 예매 중인 내한 콘서트를 훑는다. 그새 면면이 달라진 라인업을 보며 어느 공연에 가야 주옥같은 열광을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벌써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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