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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Dec 27. 2019

영화 <와일드>, I'm ready to move on

4,285km 여정의 끝에서 다시 나를, 희망을, 시작을 만나다.




영화 <와일드 Wild> (2014)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
개봉 2015. 01. 22.







셰릴 스트레이드. 시련을 다룬 여느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듯 그녀의 성장 배경 또한 삐뚤빼뚤한 자투리 천으로 기워 엮은 옷을 입은 채였다. 가난한 형편에 폭력을 저지르기 일쑤였던 아버지와 그로 인한 부모의 이혼으로 그녀의 어린 시절은 결핍으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시간은 가기 마련이므로 가까스로 평범한 삶에 닿는가 싶었던 셰릴의 바람은 다시 무너지고 만다. 불행했던 삶의 아군이 되어주었던 엄마, 서로의 삶을 끔찍이 여겨주었던 엄마가 갑자기 암으로 투병 끝에 세상을 뜨면서였다.



셰릴은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you're the center of me. everything I am."이라 말하며 울먹였다. 너무 슬퍼서 차마 터지지도 못한 울음이었다. 삶이 결코 쉽지 않았던 그녀에게 엄마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 둥치 같은 존재였다. 그녀 삶의 밝고 어두운 면을 고루 차지하고 있던 엄마의 자리가 텅 비어버리자, 그녀는 삶을 살아갈 모든 힘을 잃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현실을 마주할 기력이 없었던 셰릴의 삶은 망가졌다. 하루하루가 값싼 환각과 조악한 쾌락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셰릴은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을 떠도는 삶 끝에 약물 중독과 이혼이라는 위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한 번 삐걱이기 시작한 삶의 궤도를 되돌리기에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개인의 힘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무너져 내린 이유는 엄마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도 엄마였다. 셰릴은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에 휩싸인다. 이어지는 각성은, 그녀로 하여금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돌아가고자 결심하게 한다. 그리고 그때 운명적이게도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그녀는 PCT(The Pacific Crest Trail)*를 소개하는 책을 손에 쥔다. 극한의 공간, 지난한 여정, 인간의 한계…. 셰릴은 결심했고, 이어 4,285km의 여정을 시작한다.



걷고 또 걷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어떻게 만질 수도 없이 부르튼 발과 몸 곳곳에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상처가 남고, 목이 말랐고 외로웠으며 때론 두려움에 떨었다.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은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고 감회에 젖게 만들기도 했다. 때로 지금껏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사무치는 나쁜 기억의 습격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걸음마다 지난 삶의 회한이 발자국으로 남는 끝없는 길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거쳐 여정의 종반에 다다랐을 때, 셰릴은 어느 비에 젖은 숲의 오솔길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때 묻지 않은 소년은 그녀 앞에서 해맑은 얼굴과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당신과 함께 떠나간 빛은 우리의 오솔길을 비추던 빛이어라.' 노래 끝에 셰릴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그 소년이 자리를 뜨고 적막한 숲에 홀로 남겨졌을 때, 셰릴은 결국 왈칵 쏟아지는 흐느낌을 어쩌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지나간 후회와 기쁨의 순간이 한데 뭉쳐 그녀의 속내를 휩쓸었다. 셰릴의 여정을 스크린으로나마 함께 한 나 또한 그 심정의 자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울음이었다.



셰릴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까마득한 막막함을 느꼈을 때 우연찮게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었던 그 여정 앞에서 그녀는 수없이 지쳐 쓰러져도 "I'm ready to move on."이라 다짐하며 묵직한 걸음을 내디뎠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에 기반해 디딘 걸음이었고, 확고한 의지는 그녀를 종착지에 데려다주었다. '꿈'이 있었고 '좋은 아이' 였던 셰릴은, 마침내 4,285km의 도착점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출발했다.






* PCT(The Pacific Crest Trail)  |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여행 코스. 거친 등산로와 눈 덮인 고산 지대, 아홉 개의 산맥과 사막, 광활한 평원과 화산지대까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자연환경을 거치고서야 완주할 수 있는 PCT는 평균 152일이 걸리는 극한의 도보여행 코스로 ‘악마의 코스’라 불리기도 한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도 쉽지 않은 코스일 뿐만 아니라 폭설이나 화재와 같이 뜻하지 않은 재해로 수개월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기에 연간 약 125명이 겨우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극한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PCT는 절대 고독의 공간으로, 도보 여행자들은 육체적인 피로는 물론 수시로 찾아오는 외로움과도 맞서 싸워야만 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와일드> 주요 정보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8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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