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 속에서 아주 짧은 전진과 긴 후퇴를 거듭하는 삶에 대하여
영화 <산다>(2014)
감독 박정범
출연 박정범 / 이승연 / 박명훈 외
개봉 2015. 05. 21.
영화는 주인공 정철이 혹한의 겨울날에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추운 날씨와 쌓인 눈은 개의치도 않은 채 나무를 베어내고 큰 바윗돌을 뽑아내고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판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혼자 고된 모든 일을 해낼 뿐이다. 그는 외롭다.
도입부는 그가 이제껏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함축이다. 정철은 정신이 오락가락한 누나를 돌보고 그런 누나를 대신해 조카를 책임졌으며, 친구 명훈의 삶까지 건사해야 하는 가운데 일용직으로 일하다 밀린 임금을 못 받고 일자리를 잃는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 임금을 빼돌렸다는 오해까지 받으며 몰아붙여지는 정철은 그야말로 삶의 벼랑에 서있다. 옆에서 그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짐을 덜어줄 만한 이는 없다.
주변인들이 모두 저 아프고 힘들다고 정철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그는 그 모든 일을 이를 악물고 버텨낸다. 그러나 암울한 인생에 잠시 해가 뜰 것 같다가도 먹구름이 밀려오고, 한 발짝 나간 것 같으면 다시 뒷덜미가 잡혀 끌려오고, 질척한 진흙탕에 발이 빠져 발버둥을 쳐봐도 제자리인 것처럼 그의 삶은 바람 잘 날이 없다. 누나는 자식을 놓고 홀연히 사라지기 일쑤고 엄마의 정을 받지 못한 조카는 방황하며 친구인 명훈은 철없는 소리만 입에 올린다. 그 와중에 뛰고 또 뛰어도 주머니는 여전히 빈궁하다. 정철이 아무리 사느라고 애를 써도 그가 손에 쥐고자 하던 모든 것은 마치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스르르 빠져나간다.
나는 그가 삶의 굴곡진 어느 순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포기하길 바랐다. 딱 한 번이라도 더는 못하겠다고 주저앉아 버렸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에게 쉴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안식은 어디에도 없는 기댈 곳 없는 그의 삶…. 그러나 그는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어퍼컷을 얻어맞아도 매번 다시 털고 일어났다. 버티다 못해 그가 무너져 버리진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는 내게 보란 듯이, 삶이 그에게 무슨 짓을 했건 간에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나무를 베고 일을 하며 사람들을 건사했다.
그도 그의 삶이 엉망진창인 데다 빛나는 희망이란 요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한 이유를 친구 명훈의 지나가는 듯한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굴릴 수도 없이 낡아 빠져 덜덜거리는 트럭을 처분하러 간 카센터에서 명훈은 특유의 어리숙한 말투로 주인에게 묻는다.
"카오디오에서 자꾸 똑같은 음악만 나와서 고치러 갔는데 어쨌든 고장 난 건 아니죠? 음악이 나오긴 하니까요."
어쩌면 정철도 자신의 삶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수습해도 터지는 사고들, 사람을 잃고 돈도 잃는 매일의 반복. 실낱같은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 매일이 똑같은 삶이지만 어쨌든 숨이 붙은 채로 아직 살아있으니 살아야 하는 거라고. 삶이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가 비루한 넝마가 되었을 지라도 끈질기게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삶에 대한 본능이 그를 멈추지 않게 움직인 것이 아닐까.
정철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냉엄한 삶, 그 모습을 보며 <레바논 감정>(2014), <거인>(2014)과 같은 작품들이 떠올랐다. 숨통을 트고 싶어도 자꾸만 물밑으로 끌어당겨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정철에게 겹쳐졌다. 가혹한 삶이 호의는커녕 배신에 배신을 거듭할지라도, <레바논 감정>의 '여자'와 <거인>의 '영재'처럼 그럼에도 살아갈 정철. 매일 더 깊은 물속으로 무겁게 가라앉아만 가는 그의 삶이 기적적으로 건져지는 순간, 과연 그 순간이 오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