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마음들에는 닿을 수 없다. 영영.
외할머니는 집안의 하나뿐인 손녀딸을 많이 예뻐하셨다. '편식하지 말아야지' 하시면서도 밥을 지을 땐 콩을 한편에 몰아 지으시고는 내 몫의 흰쌀밥을 먼저 떠놓은 뒤에야 콩을 섞으셨다.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해' 하시면서도 매콤 달콤한 제육볶음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시거나 한 술 푹 떠 밥그릇에 얹어 주셨다. '단 거 많이 먹으면 안 된단다' 하시면서도 손이 아플 만큼 한참을 치대고 굴려 손수 만드신 약과에 조청을 듬뿍 묻혀 주셨더랬다.
여름 무더위에 덮을 가슬가슬한 홑이불을 직접 지어주신 것도, 주머니에서 흩어지는 동전을 넣고 다닐 동전지갑을 만들어 주신 것도, 잘 때 오금 뒤에 베고 잘 기다란 쿠션을 손수 솜을 넣고 박음질해 만들어주신 것도 모두 할머니셨다. 바람이 불 때면 창문에서 나풀거리는 레이스 커튼도 할머니의 재봉틀을 거쳤다.
건강 검진을 위해 MRI 촬영을 하셨을 때도 마음에 두셨던 건 당신의 건강이 아니셨다. '그 큰 통에 들어가니 천둥 같은 소리가 끊이지 않아 골이 다 아프던데, 혜리 그 어린 것이 그 고생을 어떻게 했단 말이니' 하고 엄마에게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단다. 나중에 내게도 그 말씀을 하시기에 '에이 아니에요. 저는 놀이기구 같고 재밌었어요.' 하니 철없다며 웃으시다 돌아서시는 얼굴에 내려앉던 그림자를 기억한다.
요즈음의 할머니는 옛날 옛적의 기억은 분명하지만 어제와 오늘의 기억은 잦아드는 안개와 같고, 지난날의 다른 얼굴들은 선명하지만 근래의 새로운 얼굴들은 쉽게 망각되고야 마는 날들을 보내고 계신다. 여든의 연세가 가까워져도 총총히 빛났던 눈동자에는 흐린 안개가 스며들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고 자상했던 낯빛은 점점 저물어 간다. "아유, 정말. 할머니 딸 때문에 제가 엄청 속을 썩어요. 할머니 딸은 누구~?" 하며 엄마를 두고 일부러 익살을 부릴 때에야 설핏 웃음기를 띄우실 뿐이다.
할머니의 콩밥, 제육볶음과 두부조림, 약과. 홑이불과 동전지갑과 쿠션 그리고 커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나를 바라보시던 눈빛.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그 낫낫한 마음들이 사무친다. 그 마음들은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과 너무 멀리 있다. 할머니는 여전히 이곳에 계시지만, 이제 그 마음들에는 닿을 수 없다. 영영.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눌러붙은 기억과 감정의 부스러기를 긁어내어, 비로소 내 이야기를 바깥에 터놓은 수필집 <나도 모르는 내 이야기>를 엮어 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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