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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Mar 23. 2020

책 <9번의 일>, 그는 무엇을 위해 견디는가.

회사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는 몰랐다. 알 수 없었다.




<9번의 일>
김혜진
한겨레출판
2019년 10월




회사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는 몰랐다.
알 수 없었다.




'그'는 통신회사의 설비 기사로 20년을 일했다. 회사에 대한 신뢰와 소속감으로 그의 20년은 성실과 근면 그 자체였지만, 그의 등에는 어느 날 '저성과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회사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그의 직무를 박탈하고 설비팀을 해체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는 교육과 영업과 오지 근무로 등떠밀렸다. 종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길 아래서 독후감을 써 검사받았고, 휑한 길목을 서성이며 전단지를 돌렸으며, 막일이라도 하듯 산을 타며 통신탑을 짓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렇게 한 단계씩 20년 간 몸담았던 직무와 멀어질수록 그는 회사를 향해 물었다. 이 일을 수긍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언제쯤이면 다시 원래 직무를 맡을 수 있는지. 그 때마다 회사를 대리하는 윗선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거나 '본사에서도 여러분과 같이 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라는 두루뭉술한 회유로 상황을 면피했다. 그렇게 평생을 몸 바친 생업으로부터 떠밀린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동료들이 끝도 없는 한직으로 밀렸다. 이보다 더한 한직이 있을까 싶을 때면 곱절의 푸대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회사를 믿었다. '여기서 이번에만 잘 하시면 잘 될 수 있다'라는 허황한 약속을 믿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일해 온 회사에서 내쫓기는 것보다야 잠시 툭 밀려나는게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약속은 미뤄지고 신뢰는 번번이 깨졌다. 그에게도 회의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수모를 견디고 있는지 몰랐다. 회사는 항상 '잘 아시지 않냐'라고 물었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평생 전화와 인터넷 선을 끌어오고 연결하며 살았지만, 저 자신이 퉁겨져 나온 이유는 어디에 어떻게 접붙여야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그를 회사로부터 내팽개친 주체의 실체는 흐려졌다. 누구도 지나간 약속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회사니 본사니, 윗선이니 무슨 담당자니 하는 건 의미없는 글자에 불과했다. 그는 회사에서 지급된 작업 점퍼의 가슴팍에 인쇄된 회사 로고를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노란색 로고는 그렇게 명쾌해 보일 수 없었지만, 그 로고 아래 일하는 그의 얼굴은 마냥 흐렸다.



회사를 위해 힘껏 일하고, 그 대가로 소속감을 부여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남은 건 모멸감 뿐이었다. 회사를 위한 노동자로서의 삶이 목적이었는지, 수단이었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다만 쓰다 남은 부속이 되어 있었고, 이미 녹이 슬대로 슬어 삐걱이는 마음만이 남았다. 회사는, 여전히 답이 없고 말이 없다.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113-114쪽)




사는 동안 그는 스스로 특별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이목을 끌거나 부러움을 살만한 뭔가를 욕심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마음을 나누고 소박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내면의 어떤 부분들이 작동을 멈추는 것 같았고 어떻게 손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162쪽)




한수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더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매일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실체도 없는 회사를 대면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스스로의 바닥을 확인하고 매일 그것을 갱신해야만 가능해지는 이런 싸움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닿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까지 이르러야만 이 기이한 집착과 이상한 오기를 모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을을 빠져나가는 한수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당 입구에 서 있었다.

(243-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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