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오는 사냥의 덫. 그 틈을 비집는 처절한 분투.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감독 홍원찬
출연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외
개봉 2020. 08. 05.
스크린에 수많은 피를 흩뿌렸던 그간의 범죄 스릴러 액션물을 떠올려 보면, 나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원한 혹은 복수심을 액션의 동력으로 삼는 인물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부모를 죽여서, 형제를 괴롭혀서, 내 아이를 납치했다는 사연으로 분명한 동력을 얻어 피의 드라마를 완성했던 인물들. 얼핏 보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도 그런 인물들의 연장선으로 보이지만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레이의 동력은 표면적으론 형 '고레다'의 죽음이다. 연을 끊고 지낸 탓에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몰랐다는 형제. 어쨌든 피붙이. 그런 형의 장례식장에 도통 어울리지 않을 행색으로 나타난 레이는 별다른 애도의 기색도 없이, 슬픔의 깊이도 없는 표정으로 암살자를 찾아 나선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연이 끊기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나 그에 대한 대화 혹은 독백 등의 방식으로 레이에게 동력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가 암살자 '인남'을 찾아 나서야 하는 필연적 이유와 결심을 관객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레이 또한 인남에 대비되는 한 축의 드라마를 세우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레이의 외적 동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백정'이라 불리는, 성장과 함께 살육을 학습한 레이. 그는 한 번 입질을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이유는 중요치 않아지는, 목표물에 대한 집착적 욕심이 광적이기까지 한 인물일 뿐이다.
최종 목표인 인남에게 도달하기까지 그가 거친 살상의 과정들 속에서, 그가 입에 올리는 건 오로지 '손맛을 볼 수 있는 희열'이다. 형에 대한 애도보다 그의 손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두려움 섞인 애원을 즐긴다. 이렇다 할 작전도 궁리도 없이 오직 레이더의 끄트머리에 걸린 인남만을 쫓아온 그가 마침내 최종 목표물과 대면했을 때, 그의 눈빛은 적개심이 아닌 사냥적 본능으로 빛난다. 그의 편집증적인 레이더는 완벽하게 집중할 목표물이 필요했을 뿐이고, 형의 죽음은 그에 걸맞은 환상적인 선물이었던 셈이다.
악을 행해야 하는 인물에게 동력이 있을 때, 보통은 그것이 곧 그의 약점이 되고 동시에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만 레이는 그 공식을 부순다. 형의 죽음은 레이에게 단초는 될 수 있어도 동력은 될 수 없었다. 약점도, 강점도 될 수 없었다. 레이는 단지 레이 그 자체로 존재했다. 더불어 '레이'라는 인물의 뼈대에 덧입혀진 스타일링과 컨셉은 그의 괴팍하고도 고집스러운 성격을 대변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를 납득하게 만든다.
그 덕분으로 레이는 오직 최종 목표만을 위해 포악한 방식으로 장애물을 돌파하는 액션을 일구어냈고, 그 거칠 것 없는 액션은 그의 성정 자체를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었다. '레이'는 서슬 퍼런 타격감이 진동하는 액션과 결합하기에 모자람 없는 캐릭터인 동시에, <관상>의 '수양대군'에 이어 이정재가 쌓아올린 매력적인 악인 캐릭터의 또다른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