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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Sep 28. 2020

책 <침묵주의보>, 이 사회의 비겁을 벗어나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믿어보는 일.






<침묵주의보>
정진영
문학수첩
2018년 3월






한 언론사에 정규직 전환형 전형으로 입사한 인턴이 회사 건물에서 투신한다. 단순히 구직에 대한 피로가 누적된 청춘의 포기로 치부될 뻔했던 사건은, 그가 남긴 유서에서 촉발된 청년들의 토로로 인해 어떠한 사회 현상을 초래한다. <침묵주의보>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사이 어디께에 걸친 채로 그 현상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나가는 인물, '박대혁'의 이야기다.



개인에 대한 가능성이 고작 몇 과목의 시험과 일률적인 점수로만 책정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불러온 학벌 만능주의. 정규직이 아닌 대체인력과 잡일꾼만 양산하는 인턴 시스템.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는 뭔가 이상한 신규 채용 등 이 사회의 비틀린 취업 시장을 성토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꽉 막힌 천장을 뚫지 못한다.



사람이 죽고 그의 죽음이 파장을 일으킨다 한들, 그 균열을 메울 다른 이의 삶이 이 사회에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갑갑한 천장을 아무리 두드려도, 빈틈이 생길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메워지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고야 마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래된 규칙이다.



대혁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자 한다. 견고한 성과도 같은 기존의 규칙을 사수하려는 기성세대의 안일한 대응을 거부하고자 결심한다. 그 행동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정의로운 결단이었지만,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그저 자발적 낙오에 불과한 것으로 비치고 말 것이다.



대혁은 그걸 알면서도 결심했고, 뒤돌아 보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한 개인의 탈피는 이 거대한 사회에 요만큼의 영구적 균열도 내지 못할 테다. 그러나 대혁은 그 작은 힘을 믿는다. 적어도 사회에 보태질 수 있었던 하나의 비겁을 치웠으므로, 그로 인해 세상이 아주아주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조금 허탈한 믿음이라 해도.







사회의 악질적 단면을 고발하는 작품을 읽을 때면 매 문장, 매 쪽마다 으레 드는 생각이 있다.


'나라면?'

'나였다면?'


그 단순한 자문에 대한 답은, 차마 활자로 쓰기 부끄러운 것이다. 내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지당하게 취해야 할 태도와 행동과 말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과연 그 상황을 당면했을 때의 내가 '박대혁'처럼 어떤 고민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이 사회적 인간의 나약함을 어찌할 것인지, 여전히 세상을 소수의 영웅에게 맡기고파 하는 비겁함을 또 어찌할 것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대혁아, 조직에겐 기억력이 없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왔느냐는 조직의 고려 대상이 아니야. 백 가지 잘한 일보다 한 가지 잘못한 일을 기억하는 게 조직이다. 지금 당장 개새끼면 앞으로도 계속 개새끼가 되는 거야. 명심해라."

(23쪽)




"형도 많이 변했네요. 솔직히 형이 더 흥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묵으로 얻은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조건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조직, 아니 대한민국에서 힘없는 놈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더라. 네가 문제를 지적하고 쿨하게 조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동요는 잠깐뿐이야. 곧 누군가가 네 자리를 대체하게 될 테고, 조직은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러가게 될 거야.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없어. 조직에서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도 능력이다. (후략)"

(105쪽)




내가 생각하는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아니라, 두려운 데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자세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만용이다. 나는 대책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군인이 용감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 중 하나는 직장인이 사표를 제출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표 제출은 앞으로 먹게 될 밥의 질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39쪽)




"독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언론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해. 언론이 기업과 정부의 광고에 의존하지 않도록 기사를 유료화하면 돼. 독자가 기사를 생필품 구입하듯 돈 주고 사서 보면 언론이 독자의 눈치를 보지, 기업과 정부의 눈치를 보겠어? 아마 기사의 질도 매우 높아질걸?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면 바로 시장에서 퇴출될 테니까. 기사에 목숨을 걸지 않을 기자들이 없겠지. 질 낮은 낚시 기사와 우라까이로 인터넷 클릭수를 늘려 광고비를 따먹는 매체는 처음부터 발붙일 수 없게 될 거야. 그런데 말이다. 지금처럼 뉴스를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언론이 독자의 눈치를 볼까, 돈줄을 쥔 기업과 정부의 눈치를 볼까? 백날 독자가 기레기라고 욕하고 떠들어봐야 언론은 코웃음도 안 친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기레기는 계속 기레기로 남을 테고, 독자도 지갑을 열진 않겠지. 아마 우린 곧 망할 거야."

(304-305쪽)










JTBC 드라마 <허쉬>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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